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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_ 박순옥

‘생과 사’, 그 좁은 틈 사이에서

기억 : 잃어버린 고향의 시간

할머니는 철원에서 태어났다. 일제 시대였지만 부잣집 지주 딸이라 남부럽지 않게 자랐다. 마을에서 학교를 다니는 여자아이가 딱 2명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할머니였다. 그러나 시대는 할머니의 삶에 조금씩 그늘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해방이 되고, 6.25가 발발하고 피난길에 오르고, 한국 사회에서 정착하는 전 생애 동안 할머니는 맨발로 질퍽거리는 늪 가장자리를 걷는 심정으로 살았다. 언제 깊은 늪으로 빠질지 알 수는 공포를 안은 채 매일 걸어야 했다. 옆에서는 가족과 친지들이 아무 이유도 없이 그 늪으로 빠져 들어갔다. 이념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오빠가 희생되었다. 집으로 폭탄이 떨어졌고, 엄마의 다리는 폭탄의 파편으로 붉게 물들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던 어린 소녀였던 할머니는 외숙모의 주검 위로 도망쳤다. 생과 사는 종이 한 장 차이였고, 그 사이 위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그렇게 깃털보다 가벼운 삶을 부여잡고, 할머니는 ‘살아냈다.’

할머니의 삶의 공간은 크게 3곳이다. 태어나서 시집을 갔던 철원, 그리고 피난 과정에서 잠깐 머물렀던 김천, 그리고 정착한 수원이 그것이다. 시간상으로는 철원과 피난길의 과정이 길지 않다. 그러나 할머니의 머릿속에서는 가장 ‘자세히’ 기억되고 있다. 원래 시공간은 함께 가는 것이다. 내가 어떤 시간으로 그 공간을 채우느냐에 따라 공간은 무한히 확장되기도 하고, 송곳 하나 세울 수 없을 정도로 좁아지기도 한다. 할머니가 가족들과 함께 생과 사를 넘나들었던 ‘시간’들이 넘치고 넘쳐, 철원과 피난길이라는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사진출저 : 수원화성박물관_ 수원천변 풍경


“우리 동네에서 초등학교를 나하고, 오촌 네 큰 댁 걔하고 둘만 댕겼지.”

지주집안에서 유복하게 자란 할머니는 마을의 둘 뿐인 초등학교 ‘여’학생이었다. 그러나 그 삶 역시 평탄치는 않았다. 해방 직전 사실상 패망의 길을 걷고 있던 일제는 거의 ‘발악’에 가까운 정책들을 펼쳤다. 공공연하게 정신대에 소녀들을 끌고 갔고, 학도병을 모집했다. 초등학생들 역시 단체로 실 만드는 공장에서 한 달씩 강제 노동을 해야 했다. 그 와중에 공장에 폭탄이 떨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흉흉한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할머니는 돌연 ‘해방’을 맞이한다.

“학교에서 4반, 5반이 여자반인데. 4반은 일본 선생님, 5반은 한국선생님이었어요. 하루는 학교를 가니까 학교가 어리둥절 숭덩숭덩해요. 그래서 ‘왜 그러냐? 해방 됐데. 해방이 뭔데? 나도 몰라.’ 쑥덕쑥덕하는데, (일본)선생님이 우리를 보고 막 울어. 선생님이 우니까 우리도 막 울었던 말이야. 선생님이 그러다가 눈물을 스치면서 나간단 말이야. 그런데 옆 반에는 동해물과 백두산을 애국가 부르는 소리가 나. ‘이게 어떻게 된 거냐? 몰라’ 쑥덕쑥덕하는데, (한국)선생님이 와서 ‘야, 니들 왜 울어?’해요. 그래서 막 웃었어. 원래 한국말 한 번 하면 변소 청소를 시켰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한국말 하니까 웃긴 거야. 그러자 선생님이 니들 울지 마라. 이러면서 풍금을 치면서 애국가를 가르쳐 주는 거예요.”

그렇게 ‘해방’이란 의미조차 알지 못 할 정도로 어린 소녀였던 할머니는 울고 웃으며 ‘해방’을 맞았다. 그리고 두 해 뒤, 결혼을 한다. 당시 근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박부자네 딸’과 결혼을 하고 싶어 했다. 어머니는 청혼이 들어온 집 중 좋은 집을 골랐다. 시아버지 될 사람이 한약방을 하며 동네 청년들을 가르치는 괜찮은 집이었다. 어머니는 사위 될 사람을 직접 보고 나니 더 마음에 들어 했다. 키가 장대하게 큰 멋쟁이였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곧 결혼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마을은 더욱 흉흉해졌다. 우리 힘으로 찾지 않은 ‘해방’은 우리가 기대한 ‘평화’를 주지 않았다. 한때 같은 마을 사람이었던 이들은 이제 서로의 ‘이념’을 감시하는 감시자가 되었고, 그 잣대로 ‘학살’이 자행되었다. 그 출발은 1945년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연합국의 조선 처리 방침(신탁통치)이었다. 그러자 이남에서는 대규모 반탁 운동이 일어났다. 반면 이북에서는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세워지고 3월 토지 개혁이 실시되었다. 서로 다른 길을 가는 이남과 이북의 ‘이념’대립은 철원에 매섭게 불어 닥쳤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이웃이 무서워 새댁이었던 할머니는 남편과 함께 친정에 와 있었다. 그러나 친정은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오빠, 엄마, 나 다 붙잡혀 갔지. 빨갱이한테 붙잡혀 갔지. 지주라고. 남편은 똥통에 숨어서 간신히 모면했어. 빨갱이들이 후퇴를 하면서 우리를 붙잡아갔는데, 오빠만 붙잡고 우리를 내주더라. 오빠를 고문하는데. 말도 못해……. 눈이 펄펄 쏟아지는데 오빠를 발가벗겨놓고 고문을 하는 거야. 동생이 그걸 어떡해봐. 이 얘기를 어디다 다해…….(울음) 같은 조선 사람끼리 서로 의지해 사는 거지. 이럴 수 있냐고. 그냥 막 들이대니까 민청 남자들이 붙잡아. 그래서 ‘이 개새끼들. 너희들이 뭔데 나를 붙잡아. 어째 사람들이 죄 없는 줄 뻔히 알면서 잡아다가 이 따위 짓거리를 하냐!’ 오빠가 그 고문을 당하고, 며칠 있다가 또 붙잡혀 가서 행방불명으로 죽은 거예요.”

불행은 겹쳐왔다. 친정어머니가 미군 폭격을 맞고 다리가 부러졌다. 거기에 아버지와 두 동생 역시 열병에 걸렸다. 약도 없던 시절 친정식구 모두가 꼼짝없이 누워있었다. 결국 할머니가 친정에 머물며 식구들 병수발을 해야 했다.

“아버지도 아프고 동생들도 아프고 엄마도 드러누워 있고. 이러니까 애들이 똥을 못 누잖아요. 그래서 똥요강을 방 가운데다 두고, 요강에도 똥 누고 이러면 내가 갖다 버리고 갖다 놓고 이랬거든요. 그때 인민군대가 집집마다 댕기면서 총 들고 쏴 죽인다고 빨리 나가라는 거예요. ‘집집마다 댕기면서 인민군들 오면 빨리 이북으로 가라고.’ (그런데 인민군이 와서 보니) 똥요강 거기 있지. 아프다고 야단이지. 성한 사람은 나가고. 다 난리고. 식구들 간호하는 사람 나 하나뿐이지. 아버지 아프시고. 애들 아프고 이러니까. 이불 냄새 나고. 빨아 덮을 새가 어디 있어. (이불을) 풀떡풀떡 하면 냄새만 쿨쿨 나지. 땀내 나고 똥요강 가운데 놔두고. ‘아이구아이구. 아이고, 죽는다.’고 엄살을 더 했잖아요. 끌어갈까봐. 아프기도 아프지. 열이 펄펄 나고 약도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냥 가더라고요.”

부유 : 생과 사를 넘던 그날들

할머니가 친정 식구들을 돌보는 사이 남편은 방공호에 숨어 있었다. 몇 달 뒤에 보니 남편은 ‘여드름이 덕지덕지, 머리끝마다 머릿니와 서캐가 조롱조롱’ 달려있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남편은 몰래 이불을 덮고 매일 라디오를 들었다. 만약 그 모습을 이웃의 누가 봐서 고발이라도 한다면 바로, ‘총살’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할머니를 불렀다.

“남편이 이불 속에서 라디오를 듣더니 이남으로 가야 산대요. 근데 그런 중간에도 이 양반은 옷이 그리워. 아주 옷 탐이 많은 사람이야. 나를 불러서 ‘여보 이남에 가면 사지스봉(청바지로 추정됨)이라는 게 있는데. 구기지도 않고 물도 안 먹고 좋은 게 있대. 그런 좋은 천으로 만든 게 있는데 빨리 이남으로 가서 사 입어야 돼.’ (웃음) 농담 삼아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

그렇게 남편은 만날 이불을 뒤집어쓰고 라디오 뉴스를 듣다가 월하리에 가면 미군 트럭이 몇 대씩 오고, 그 트럭이 이남으로 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할머니는 친정에 머물며 아픈 식구들을 돌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누이가 찾아왔다. 시누이는 식구 모두가 피난을 떠나기로 했다며 ‘지금 빨리 오지 않으며 영영 이별이니’ 어서 돌아오라고 했다. 그러나 거동도 못하는 친정 식구들을 두고 할머니의 발걸음이 쉬이 떨어질리 없었다.

“아버지가 쭉쭉 우시는 거야. 너 가면 우리 식구는 어떻게 되는 거냐. 네가 죽 쑤고 밥해서 먹이는데. 너 가면 우리 식구는 다 죽는다. 하면서 눈물을 흘리셔. 안 갈 수도 없고. 갈 수도 없고. 그래서 (내가 엄마에게 물었어) 어떡하지 엄마. 그러니까 엄마가 드러누워서 어떡하랴. 시집을 갔으니, 시집을 가야지. 아버지는 울면서 어떡해. 이 난리 통에 죽지 말고 살아라……. (그때는 서로 얼굴) 보는 그 시간만 살은 거예요. 서로 떨어지면 언제 죽을는지 살는지 몰라. 예측도 못해. 폭격 맞음 금방이라도 죽으니까.”

시댁으로 온 할머니는 피난 보따리를 꾸렸다. 시할머니, 시부모님, 남편, 시누이, 시동생, 조카들까지 대식구의 이동이었다. 먹을 식량과 옷 보따리를 이고 매고, 월하리에 가니 정말 미군 트럭이 있었다. 사람들은 꾸역꾸역 올라탔고, 할머니네 가족도 올라탔다. 그런데 그때 예상치도 못한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우리가 트럭에 올라 타 있는데 인민군대가 들어왔어요. 그러더니 남자 세 사람을 끌어내리는 거예요. 아니 근데 저그 아버지(남편)까지 끌어내리네. 어떤 사상인지 모르기 때문에 이 사람은 수상한 사람이다. 이러면서 끌어내리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이 내리면서 차가 붕 떠나네. 아이고, 이를 어째. 시동생들은 아직 어려서 올망졸망하고, 시아버지, 시어머니, 할머니 고모들 이렇게 다 있는데. 젊은 사람 하나만 든든한데. 저걸 끌어내리니 어떡해.”

졸지에 남편과 생이별을 한 할머니는 서울역까지 정신없이 실려 온다. 서울역에 도착하니 다시 기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또 기차에 올라탔다. 어리둥절해 올라타고 보니 그곳은 사람이 타는 ‘객차’가 아니라, 연탄을 싣고 나르던 ‘짐칸’이었다.



“사람들이 (연탄 때문에) 눈만 빤질빤질, 모두 새까매. (피난민들의 몰골이) 짐승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고. 미군들이 와서 ‘쏼라쏼라’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있나. 그렇게 가다 서다, 가다 서다 사흘을 가는데. 배가 고파 죽겠는 거야. 피난 나올 때 이만큼 큰 통에 밥을 해 가지고 나갔는데. 시할머니가, 아휴……. 내 식구가 최고지. 글쎄 ‘아무개 아버지 이리 오소!’ 하면서 동네사람들을 먹이고 여자가 먹으면 뭐해 하고 나를 못 먹게 하더라고. 고모는 뒤에서 손만 넣어서 주먹으로 퍼서 잡수시던데. 나는 손 넣고는 못 먹겠소. 체면 가리다 보니 나만 굶은 거야. 세상에. 한 끼 건너, 두 끼 건너, 세 끼 건너 다 죽게 생겼네.”

더 이상 배고픔을 견딜 수 없던 할머니는 식구들과 함께 기차에서 내린다. 내리고 보니 그곳은 ‘김천’이었다. 보따리를 이고 내리긴 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그때 누군가 김천시청에 가서 피난민이라고 이야기하면 자리를 봐줄 거라고 했다. 그래서 물어물어 시청에 갔다. 시청에서 사람이 나왔다. 그는 흩어져 있는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았다.

“시청마당에 다 모였는데 세상에 (연탄가루를 뒤집어써서) 강아지 새끼인지, 사람인지 서로 쳐다보고 웃는 거야. 그러고 있으니까 어디도 못나가게 하더니 띠띠약(가루소독약, DDT)을 확 뿌려놓네. 소독을 시키는 거야. 열병을 앓은 사람이 많으니, 하얀 가루 홀랑 뒤집어 씌어 놓는 거야. 그리고 서도립병원 입원실로 가래. 거기 비웠다고 피난민들을 한꺼번에 칸칸이 넣어주더라고.”

그러나 할머니는 그때부터 열이 펄펄 나기 시작했다. 피난 전부터 친정식구들을 돌보며 무리했던 몸이 피난길에 내리 굶다보니 사단이 난 것이다. 달랑 옷이 3개든 보따리가 천근만근 느껴졌다. 발 한걸음도 떼기 힘든데 시할머니는 다른 짐 안 옮긴다고 야단을 쳤다. 할머니의 발걸음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기어가듯 서도립병원에 도착했다. 그렇게 몇 달을 지냈을까. 갑자기 김천으로 편지가 왔다. 생전에 다시 못 볼 줄 알았던 남편이었다.

“김천에 같이 피난 왔던 친구가 수원에 피난민이 많다고 해서 수원으로 갔어요. 그런데 수원서 댕기다가 지 아버지(남편)를 만난 거예요. 그래서 순옥이 여기 있다. 라고 알려주니까. 주소를 알려달라고 해서 그 주소로 편지를 한 거예요. ‘옷 팔아서 수원으로 와. 내가 더 좋은 옷 사줄게’(웃음) 이렇게.”

그러나 당시 김천에서 수원까지는 너무나 먼 거리였다. 딸린 식구들은 많은데 먹고, 잘 노잣돈은커녕 차비도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가야 했기에, 지나가는 트럭을 잡아 올라탔다. 날이 어둑해질 무렵 트럭기사는 식구들을 대전에 내려주었다. 갈 곳이 없는 식구들은 옹기종기 남의 처마 밑에 모여 앉았다. 이미 날은 저물어가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아이들과 노인들의 몸을 매섭게 파고들었다. 안 되겠다 싶어 할머니는 지나가던 사람을 무작정 잡았다. 그리고 사정을 해 그 집에서 하룻밤을 났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눈뜨자마자 장에 나가 자신의 옷을 팔았다. 간단한 요기와 차비를 벌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김천을 출발한지 며칠 만에 수원에 도착했다.

정착 : 뿌리 없는 삶의 고단함

“수원 역전에 내려서 저그 아버지(남편)를 만났어요. 저그 아버지만 있을게 아니라 친구들도 있고, 아이고 세상에, 친정 식구들도 다 여기 있는 거예요. 저 북중학교 있는 데 거기 피난민들이 다 모여서 움막집을 짓고 살고 있더라고. 그래서 우리도 한 달 동안 움막집을 지었어요. 광교산을 가서 섯가리해서 얼기설기 살아야지 어뜩하냐고. 배급 쌀을 타다가 밥 해먹고. 몸빼 하나만 입고 만날 나무를 댕기니까. 이게 긁혀가지고 벌렁벌렁. 창피해서 죽겠는데 어떡하냐고. 헝겊쪼가리라도 있으면 대서 기는데. 헝겊쪼가리 없어서 못 대서기고.”

당시 수원에는 거대한 피난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김천에서 올라온 할머니는 그곳에서 남편은 물론, 친정식구들 그리고 고향 사람들까지 다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은 군인으로 나가버렸다. 또 홀로 남은 할머니는 제분 집에 다니면서 일을 했다. 집안의 유일한 수입이었다.

그 무렵 원래 한약방을 운영했던 시아버지가 살길을 찾았다. 조그만 한약방을 운영하기 시작한 것이다. 작은 집에서 시작했지만 약이 입소문을 타고 금방 돈이 벌리기 시작했다. 당시에 한약방은 곧 ‘한의사’였다. 늘 한약방에는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할머니의 삶은 편해지지 않았다.

“돈이 벌리니까 여자들이 기어들잖아요. 그러니까 바람을 피우는 거야. 바람을 피는데 확 달라지더라고. 나보고 나가래. 애기도 못 낳는 거 살아서 뭐하냐고. 애기 낳아야지. 집안을 이어가지. 막 가라고 구박을 해. 근데 무서운 게 뭐냐면, 약방에 어떤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데리고 와서 ‘우리 아기가 수태를 못해서 데려왔다.’ 그러면 진작 데려오셨어야죠 해. 막상 나한테는 약 한 첩도 안 주시고. 애기 못 낳으면 나가라고 그러시더라고. 그 난리를 겪고, 곤란할 때는 뒷바라지를 했는데 밥 먹고 살만하니까 내쫓을라고.” (눈시울이 붉어짐)

결혼한 지 5년. 그러나 결혼하자마자 남편과 떨어져 친정 식구들을 돌봤고, 피난살이 내내 남편과 떨어져 있었다. 수원으로 와서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남편은 군대로 가버렸다. 현실적으로 아이를 가지기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시댁 식구 그 누구도 할머니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심지어 시누이는 ‘애기 못 낳으면 지가 알아서 나가야지’라고 자기 친구를 남편에게 ‘붙여주기’도 했다. 그래도 할머니는 속으로 그랬다. ‘그래 봐라. 나도 병신은 아니니까. 낳을 때 되면 낳겠지.’ 정말로, 할머니는 남편이 군대에서 제대하자마자 26살에 첫 아들을 낳고, 내리 삼형제를 낳았다.

“(아들 낳았다고 대우가) 나아지긴 뭐가 나아져. 더 구박해. 정말 일만 하고 살았어. 창만 희끄번쩍하면 일어나서 그날 일을 다 못하고 살았지. 한창 바쁠 때는 부엌 단반에 밥 비벼놓고. 오며 한 숟갈, 가며 한 숟갈 하면서 일했어요. 집은 점점 부자가 됐지. 우리 시아버지 약이 잘 듣는다고 소문이 나서 돈을 끌었어. 그래도 나한테 오는 건 없어. 대신 부잣집 마누라는 일 부자야. 도대체 일이 너무 많아서. 세세 틈틈이 당신 친구들 오시면 술상 봐야지. 술국 끓여야지. 빨래해야지. 집안 청소해야지. 애들 밥해 먹어야지. 거기다가 약 바라지까지 해야 하는데 너무 힘이 드는데. 밤중까지 해도 끝이 없어요.”

당시에는 약재가 가공되지 않고 그대로 통째로 한약방으로 왔다. 그러면 그 약재를 말리고 썰고 하는 일을 모두 한약방에서 해야 했다.



“약재가 짝으로 들어와. 그러면 법제(약재에 맞게 다양한 방법으로 손질)할 거 법제하고, 말릴 거 말리고, 쓰릴거 쓰리고. 그렇게 깨끗하게 해서 약방에 착착 다 해놓으면 약제사들이 자기가 필요한 거 꺼내다가 약을 지었어요. 우리가 뒷바라지 하는데. 하루 종일 바쁘죠. 약을 당시에 써리지 않으면 그게 다 섞어. 그래서 나는 천기박사야. 만날 하늘보지. 어떤 날 비오는 날인가. 구름이 어떻게 뜨면 비가 오던가. 아침에 해가 반짝. 아침에 해 오를 적에. 저기. 아침노을이 반짝 떠서 환했다가 없어지면 눈이 와도 오고, 비가 와도 와요. 사흘 안에 와도 꼭 와요.”

그 대식구들을 뒷바라지하며, 약 바라지까지 해야 했던 할머니는 하루도 몸이 편할 날이 없었다. 그러나 몸의 고단함은 마음의 그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시대가 그렇다고 하지만, 남편이 다른 여자들을 공공연하게 만났던 것이다. 걔 중에 몇몇과는 실제로 결혼식까지 올렸다.

“(결혼할 여자를 데리고 와서) 시아버지가 ‘점심을 해내라.’ 하시데. 그러니 내 정신이 내 정신이 아니야. 바가지 가지고 장 뜨러 가려다 우물가기 일쑤야. 안개가 머릿속에 껴서. 아이고...무슨 말을 해.”

그래도 남편이 가장 급할 때 찾는 건 할머니였다. 남편이 약제사 자격증을 따자 다른 지역에 가서 한약방을 차려야 했다. 당시에는 약제사 협회에서 지정해준 곳에서만 한약방을 열 수 있었다. 처음 지정받은 곳이 동두천이었다. 그러나 한참 아이들과 수원 한약방 뒷바라지를 같이 해야 했기 때문에 그렇게 먼 곳에 한약방을 낼 수는 없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일정 기간 안에 한약방을 내지 않으면 면허가 취소됐다. 그때 다행히도 가까운 군포에 한약방 자리가 하나 났다. 그러나 그곳은 협회가 지정해주는 곳이 아니었기에 돈을 주고 사야 했다. 거금 30만원이었다.

“시아버지가 돈은 잘 벌어도 나한테 돈은 안줘. 남편도 아직 자기 한약방이 없으니 돈도 없고 있어도 나가서 다 써버리고. 그럼 어떡해. 애들 키우고 살림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내가 밤에 뜨개질, 수예품을 했어요. 당시에는 학교에서도 수예품을 배워서 샘플이 많이 필요했어. 잘해야 샘플을 할 거 아냐. 내가 놓은 게 다 샘플이었어. 밤새 수예품 놓아서 하지. 조그만 애들 ‘짠짠복’이라고 떠서 갖다 주면 돈도 좀 주고 그래요. 그래서 애들 공책도 사고, 연필도 사주고 했지. 그리고 내가 그 수예품 놓은 돈으로 곗돈을 부은 게 있었어. 그게 마침 30만원이야. 근데 그걸 타자마자 남편이 이야기를 해. 그래서 내가 남편이 돈 없어서 고개를 꾸부리고 있어 이야기 했지. 뿌리박아서 살려면 돈 돼 준다. 이거 내가 수예품 놓아서 모은 돈이야 했더니 남편이 눈을 번쩍 뜨데.”

그렇게 군포에 한약방을 차리기 시작하면서 돈이 모였다. 그 돈을 관리하고, 불린 것은 다 할머니의 공이었다. 허름한 집을 사서 목욕탕을 지어 팔았다. 그 뒤로 몇 채의 집을 더 샀고, 집만 4~5채가 되었다. 현재 있는 ‘동창당 한약방’ 역시 할머니가 직접 지은 것으로 원래는 오두막집이었다. 그렇게 동네에서 소문난 부잣집이 되어갔다.

“어느 날 남편이 그래요. ‘나는 우리 마누라 아니었으면 사기꾼 거지밖에 안 됐을 텐데. 노숙자가 됐을 텐데. 우리 마누라가 알뜰히 먹고, 뒷돈 대주고 그러는 바람에 난 부자소리 듣고 살았다.’ 그렇게 인정해 주니 고맙죠.”

그렇게 큰 집안 살림 뒷바라지 다하며, 집안 살림을 불린 며느리였지만 시아버지는 여전히 며느리를 냉대했다. 그것들은 조금씩 쌓여 어느새 할머니의 가슴에 커다란 돌덩이가 되었다. 그런 즈음에 할머니가 대수술을 하게 되었다. 자궁에 혹이 생겨, 자궁을 들어내게 된 것이다. 수술을 마치고 아파서 누워있는데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커다란 수박을 손에 든 시아버지였다.

“아버님이 이만한 수박을 들여놔주시면서, ‘얼른 일어나거라. 우리 집안은 니가 있어야 집안 이끌고 나가지. 집안 이끌고 나갈 사람이 없어’ 하시데. 작은 며느리가 3명이나 되는데도 나한테 그 얘길 하시더라고요. 이거 먹고 정신 차려라 하는데 속으로 눈물이 철철철 흐르는 거야. 어떻게 그런 말을 하실까. 그냥 마음이 서늘하면서 안으로 눈물이 절절 흐르는 거야. 여태까지 모질게 했던 그런 말이. 여기 쌓여 있던 게 봄눈 설듯 하는 거야. 그런 말 한마디에 쓰러지는 거예요. 그러면서 혼자 훌쩍훌쩍 울었어. 눈물이 나서. 그러고 나서 3년 만에 돌아가시네.”

시아버지는 63세 라는 한창 나이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전날 저녁까지도 진료를 보시고, 밤중에 갑자기 심장마비가 온 것이다. 그때 남편이 군포의 한약방을 접고 지금의 수원 한약방으로 와서 진료를 시작했다. 이때가 동창당 한약방의 전성시대이기도 했다. 그 당시 그곳에 머무는 사람이 23명에 이르렀다. 시할머니와 시누이 조카들은 물론 친척들도 이곳에 와서 일을 돕기도 하고,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시아버지처럼 남편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갓 환갑을 지난 나이였다. 아들들은 아직 어렸다. 그 빈 공백이 ‘동창당 한약방’에는 치명적이었다. 물론 달라진 세월도 한 몫을 했다. 현재는 둘째 아들이 동창당 한약방을 이어 받아 하고 있다. 여전히 약을 지으러 오는 사람들이 있지만, 과거에 비하면 그 수가 많지 않다. 간혹 아들이 조급해 하면 박순옥 할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없을 때는 공부하고, 있을 때는 보시하라고 했어. 지금 공부해야 돼. 아버지 있을 적에 고통 안 받고 호강스럽게 살다가, 어떻게 그렇게만 사니? 없을 적에 공부해야지. 파도는 나가기만 하는 거 아니야. 들어오면 알게 되는 거야. 돌부리 직접 차 본 사람이랑 알기만 하는 사람은 달라. 사람이 살다보면 어려울 때도 있고 좋은 적도 있고 나쁜 적도 있지. 어떻게 좋을 때만 있게 사냐. 그 공간을 잘 메꿔서 살아놓으면 다 살길이 돌아온다. 걱정하지 마라.”

화홍문에서 수원천을 따라 골목을 내려오면 낡고 큰 간판이 보인다. ‘동창당 한약방’이 그것이다. 큰 간판과 탄탄한 건물이 당시의 위용을 말해준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한약 냄새가 반기는데, 내부는 고풍스러우면서도 깔끔하다. 그리고 그곳에는 박순옥 할머니가 있다. 할머니는 85세란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하얗고 맑은 피부를 가지고 계신다. 처음에는 ‘좋은 한약’ 때문 인가했다. 그러나 인터뷰를 모두 마치고 보니 ‘산전수전 다 겪고’ 이를 승화시킨 할머니의 ‘내공’때문이 아닌가 싶다.



할머니와의 인터뷰는 긴 시간동안 진행되었다. 파란만장했던 한 평생, 긴 한숨으로 얼룩진 할머니의 세월의 이야기를 들어준 이 누가 있었을까? 할머니는 필자를 만나 토해내듯 이야기를 쏟아 내셨다. 놀라운 것은 그 시간들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할머니의 눈빛은 아이의 그것처럼 청명했고, 표현력은 유명 작가 못지않게 생생했다. 말과 말 사이사이, 행간에서 자신의 몸에 체화된 ‘희로애락’이 읽혔다. 할머니가 지나온 시간은 그렇게 할머니에게 ‘청명하고, 생생하게’ 아로새겨져 여든이 넘은 할머니에게 여전히 ‘생생한 기운’을 주고 있었다.

삶의 ‘희망’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재산이나 재능과 같이 내가 가진 어떤 것 혹은 환경이 전제가 되어야 할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박순옥 할머니는 그 굴곡진 인생 단면 단면에서 끊임없이 자신만의 ‘희망’을 키워왔다. 박순옥 할머니의 말처럼 ‘돌부리를 직접 차본 사람’이 그 진정한 아픔을 안다. 할머니는 파도가 왔다가 가듯 사는 게 인생이라고 말한다. 지금 파도가 나가서 괴로운 인생이 있다면 걱정 마시라. 여기에 한 현자가 말한다.

“파도는 나가기만 하는 거 아니야. 들어오면 또 그렇게 살면 되는 거야. 너나 내나 다 운세지. 어떻게 다 틀어막니? 나갈 운세에는 주저 없이 내보내. 나갈 운세니까. 내가 어떻게 막니? 세상. 그리고 조금만 더 참고 극복해 가. 그럼 살길이 돌아온다. 살던 놈은 또 산다. 걱정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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