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의 역사를 문화유산과
인물을 통해서 알아봅니다.
최용신은 1909년 함경남도 덕원에서 2남 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조부는 사립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을 하였고, 부친은 1927년 신간회 덕원지회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최용신의 기독교 신앙, 교육가 정신, 민족 사상은 가정에서부터 자연스럽게 길러졌다. 최용신이 농촌사업에 몸을 바치기로 결심한 것은 1928년 함남 원산의 루씨여고보(樓氏女高普)를 졸업하고 협성여자신학교(協成女子神學校)에 재학하면서부터였다. 당시 최용신은 “조선의 부흥은 농촌에 있고, 민족의 발전은 농민에 있다"는 생각에서 농촌계몽운동에 몸을 던져 일하였다. 1929년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 총회 때 협성학생기독교청년회의 대표로 본격적인 농촌계몽사업에 참가하였고 황해도 수안(遂安)과 강원도 포항에 파견되어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10월 YWCA 파견교사로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샘골(泉谷-현재 안산시 본오동)에 찾아온 최용신은 먼저 예배당을 빌려 한글ㆍ산술ㆍ재봉ㆍ수예ㆍ가사ㆍ노래공부ㆍ성경공부 등의 학습을 시작하였다. 헌신적 노력으로 주민들의 이해를 얻어낼 수 있었고, 어려운 중에도 학원 운영에 필요한 경비를 마련해가며 어린이를 가르치는 일에 전력을 다하였다. 그러던 중 1934년부터 YWCA의 보조금이 끊어지고 학원의 운영이 극도로 어려워지자 다방면의 노력을 강구하던 중 과로와 영양결핍으로 인한 장중첩증(한 창자가 다른 창자의 안쪽 부위로 말려 들어가는 중첩 현상이 오랜 기간 동안 반복하여 발생하는 증상)으로 사망하게 되었다(1935. 1.23) 최용신의 농촌을 살리기 위한 눈물겨운 행적(평생 동안 한 일이나 업적)을 바탕으로 심훈(沈熏)은 소설 『상록수(常綠樹)』를 발표하였다. 이 소설을 통해 최용신에 활동이 알려지게 되었고, 농촌운동의 본받을 만한 모범이 되었다. 이러한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죽은 뒤에 훈장이 주어짐)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