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의 역사를 문화유산과
인물을 통해서 알아봅니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이다. 1605년(선조 38)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1611년 정인홍의 회퇴변척(1611년(광해군 3) 3월 정인홍이 무함을 받은 스승 조식의 변호를 위해 이언적과 이황을 비판하며 배척한 일)에 분노하여 정인홍을 유생 명부에서 삭제하는 것에 앞장서다 성균관에서 쫓겨났다. 이에 가평 잠곡에서 숨어 지내다가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의금부도사, 병조좌랑, 안변도호부사, 동지성절천추진하사 등을 두루 지냈다. 1649년 우의정이 되어 대동법(여러 가지 공물(貢物)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납세 제도) 시행에 적극 노력하였으나 반대파 김집과의 불화(서로 화합하지 못함)을 겪고, 이듬해 영의정이 되어 충청도에 시행하였다. 1657년 전라도에도 대동법의 실시를 확대하고자 건의하였으나 실행되기 전에 죽었다. 저서로는 <잠곡유고>, <잠곡별고>, <잠곡속고>, <유원총보> 등이 있다. 선생의 생애는 나라 안으로는 임진·병자란을 겪은 후 극도로 지치고 쇠약해진 농업경제의 정비와 고갈된 국가 재정의 재편성을 해야했던 어려운 시기에 놓여 있었고, 밖으로는 명(明), 청(淸)나라 교체기에 놓여 있어 미묘한 정국을 요리해 나가야 하는 복잡한 시기였다. 더욱이 청(淸)나라에 지배를 받아야 했던 당시의 현실에서 효종(孝宗)은 북벌(北伐)을 꾀하는 한편 안으로는 나라를 바로 잡아야 되겠다는 의욕이 충만해 있었다. 무엇보다도 선생은 뼈대있는 집안의 후예라는 긍지와 뛰어난 기품으로 가난했던 가정형편 속에서도 학문에 열중하여, 후에 경제사상의 주축을 이루었다고 이르며, 또한 다른 사람을 구하는 것의 근본정신인 민본사상(民本思想)의 기틀이 잡혔다고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