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의 역사를 문화유산과
인물을 통해서 알아봅니다.
조선 말기의 성리학자이다. 1808년 반시(泮試: 한성초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당시 권력층의 지위 높은 관리가 과거급제를 핑계로 자기 자식과 친근하게 지낼 것을 권하자, 이에 몹시 흥분하여 과거 시험장의 출입마저 수치스럽다 하여 끝내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과거를 포기한 뒤 당시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던 서울의 임로(任魯)와 지평의 이우신(李友信) 등을 찾아가 학우의 관계를 맺었다. 30세 때 이항로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기쁜 마음으로 공경하며 사모함)한 청년들이 많이 모여들었으나, 세속을 피해 쌍계사·고달사 등 사찰을 옮겨 다니며 사서삼경과 『주자대전(朱子大全)』 등 성리학연구에 힘을 쏟았다. 이 무렵 한말의 위정척사론자(정의를 지키고 사악함을 물리친다는 뜻으로, 가톨릭과 서양의 문물을 반대한 19세기 중엽의 사상을 지지하는 사람)로 유명한 최익현(崔益鉉)·김평묵(金平默)·유중교(柳重敎) 등이 문하(가르침을 받는 스승의 아래)에서 학문을 닦았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동부승지의 자격으로 대궐에 들어가 흥선대원군에게 주전론(전쟁하기를 주장하는 의견)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 뒤 대원군의 비정(秕政)[백성을 괴롭히고 나라를 잘못되게 하는 정치]을 비판하는 상소 등으로 인해 대원군으로부터 배척당했다. 그의 학문은 성과 경을 수양의 근본으로 하였고, 사소한 일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