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의 역사를 문화유산과
인물을 통해서 알아봅니다.
[이동읍 서리 사기막골] 서리에 딸린 마을 중의 하나로 예전에 한 부부가 들어와 사기그릇을 구워 팔기 시작하면서 점차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 마을을 이루었으므로 사기막골이라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인근에 고려 백자와 조선백자를 굽던 곳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자기를 굽던 곳이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추축해볼 수 있다. [삼가동 멱조현] 삼가동 지역으로 시아버지가 호랑이에게 물려갔을 때 호랑이에게 며느리가 등에 업은 아이를 주고 시아버지를 찾았다 하여 ‘찾을 멱(覓), 할애비 조(祖) 고개 현(峴)’을 따서 멱조현이라 이름붙였다고 한다. [상갈동 금화] 상갈동 지역으로 쇠풍이라고도 한다. 약 300년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는데 마을의 생김새가 금반형(金盤形-금으로 된 쟁반 또는 그릇)이기 때문에 쇠품(釗品)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후 쇠가 빛나는 곳이라 하여 금화(金-쇠 금 華-색,빛 화)라 칭하였다고 한다. 경기도박물관을 중심으로 남서쪽 마을을 작은 쇠품이, 북쪽은 큰쇠품이라 부르고 있다. [상하동 갈곡(갈골)] 상하1동 지역으로 갈골, 갈곡 등으로도 불리고 있는데 ‘칡이 많아서 갈(葛-칡 갈)곡이라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 기흥구 중동에서 시작하는 오산천이 마을 남쪽을 지나는데 이 하천을 예로부터 갈천이라 불러왔으므로 갈천 곁에 있는 마을(谷-골 곡)이라 하여 갈곡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신갈동 상미]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상촌(桑村)과 미동(美洞)을 합치고 두 마을의 첫머리 글자를 따서 상미라 하였다. 상촌은 옛날에 뽕나무가 많은 지역이라 상촌(桑村-뽕나무마을)이라 하였으며, 미동은 과거에 내시들이 살고 있던 마을로 이들이 다른 마을보다 옷을 잘 입고 잘 먹었다고 하여 미동(美洞-아름다운 동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상현동 독바위] 본래 독바위라 지칭되어 오던 것을 한자로 표기하여 옹암(甕-독(단지) 옹 岩-바위 암)이라 하였다. 마을 산모롱이(산모퉁이의 휘어들어간 곳)에 바위가 있는데 그 모양이 마치 항아리와 같이 생겨 독바위(옹암)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독바위와 이보다 큰 바위가 함께 있었는데 서로 자리다툼을 하다가 작은 바위가 큰 바위를 들이받아 큰 바위가 멀리 나가 떨어졌다고 한다. 그 후 큰 바위가 떨어진 곳을 분하다 하여 분툭굴, 작은 바위가 큰 바위를 이겼다하여 독바위라 하였으며 이 인근에 마을이 생겨 마을 이름이 독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신봉동 서봉] 예전에 봉황이 있었던 곳이란 뜻으로 서봉(棲鳳)이라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지만 마을 서쪽 광교산에 서봉사지가 있어서 일명 서봉산으로 불리다가 서봉(瑞峰-좋은 기운이 있는 봉우리)이 서봉(棲鳳)으로 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고기동 배나무골(이곡)] 이목동(梨-배나무 이, 木-나무 목, 洞-골짜기 동)이라고 하며 예전부터 이 마을에는 집집마다 돌담을 쌓고 담장 주변에 배나무를 심어 숲을 이루었으므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배나무골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 마을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죽전동] 정몽주 선생을 모신 상여와 명정이 이곳을 지나간 것에 유래하여 정몽주를 존경하는 백성들에 의해 이곳의 지명을 죽절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죽이란 대나무로 충신을 뜻하며 절은 마디가 있는 나무이니 역시 대나무라 충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 때부터인가 죽절이 죽전으로 변했다고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