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의 역사를 문화유산과
인물을 통해서 알아봅니다.

고양 덕양구 지명이야기

이전 화면으로 가기
  • 명칭 : 고양 덕양구 지명이야기
  • 위치 : 고양
  • 시기 : 대한민국시기

[대자동] 조선시대 태종의 아들인 성령대군은 똑똑하고 용모가 단정하여 태종의 사랑을 받았는데 병에 걸려 일찍 죽었다. 이를 슬퍼한 태종은 무덤 근처에 절을 세워 불공을 드리기로 하였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길이 너무 멀어 임금이 이곳을 자주 왕래 하면 나랏일을 소홀히 할까봐 무덤 근처에 큰 자비를 내린다는 뜻으로 ‘대자사’라는 절을 지어 성녕대군의 명복을 빌었으며, 이 절의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도 대자동으로 부르게 되었다. [대장동] 대장동은 토당동 북쪽에 위치한 마을의 법정동 명칭으로 흔히 ‘대재이’라 부른다. 대부분 농촌마을이며 상대장, 중대장, 갈머리 등의 마을이 있다. 화정동과의 사이에 크고 넓은 벌판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대장동은 마을 뒤편에 있던 유명한 충신 남효온 선생의 무덤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도내동] 도내동은 임진왜란 때 석탄 의신의 의병장이 아군의 수가 왜군만큼 많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의병 300여 명을 이끌고 며칠 동안 산을 돌아서 ‘도라산’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마을이름도 ‘도래울’이라고 하였다가 ‘도내리’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돌여울(석탄)에서 도래울, 도내동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삼송동] 삼송동은 세수리라고도 한다. 예전에 세수리 마을에 커다란 소나무 세 그루가 있었는데 한자로 표기하면서 삼송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신원동] 신원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성종의 형인 월산 대군이 옛 능골마을에 궁을 짓고 살았는데 그 궁의 이름이 신원이었기 때문에 붙여졌다는 이야기와 예전 이 마을 앞에는 한양에서 중국으로 이어진큰 길이 통과하여 ‘새롭게 신(新), 고을 원(院)’자를 써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용두동] 용두동(龍頭洞)은 흔히 용머리로 불린다. ‘용두’는 서오릉이 생기면서 지금의 경릉인 덕종의 무덤 자리가 용머리 모양의 좋은 자리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북한산 백운대에서 내려다보면 15km에 달하는 산줄기가 꿈틀거리는 큰 용의 모양을 하고 있다. 서오릉은 용의 머리 부분, 용복원은 용의 배, 파주 용미리는 용의 꼬리로 보아 각기 용두동, 용복원, 용미리로 불린다. [행주동] 행주동은 이곳에 살구나무가 많아 ‘살구나무 행(杏)’자를 넣어 이름 붙여다는 이야기와 행주산성에서 큰 승리를 거둔뒤 이곳에 임금이 행차하여 붙여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현천동] 예전 이곳에 고양 8현의 한 분인 행촌 민순 선생이 살았는데 너무 가난하여 공부 할 당시 종이를 살돈이 없어 궁리 끝에 큰 가랑잎에 글씨 연습을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여름이 되어 비가 많이 내리면 행촌 선생께서 그동안 글씨를 연습하셨던 가랑잎들이그 물에 씻겨 내려 검은 물로 흘렀다. 그래서 이곳을 ‘검을 현(玄)’자와 ‘내 천(川)’자를 써서 현천리라 하였고 한자를 쓰지 않고 ‘거무내’라고 하였다. 또는 먹물이 흐르는 골짜기라 하여 ‘먹골’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향동동] 향동동은 마을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봄이 되면 산골짜기로부터 마을이 온통 꽃향기로 가득 찼기 때문에 향동이라 불렀다는 이야기와 예부터 주민들이 여러 가지 좋은 꽃을 많이 심어 그 향내가 가득하다 하여 향동이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다. [화정동] 봄이 되어 온 산에 진달래가 피게 되면, 이 우물에 꽃이 그대로 비쳐 꽃물이라고 불렀다. 또한 이 지역에 찬 우물이 있었는데 냉정이라 하였다. 꽃물(화수)의 ‘꽃 화(花)’자와 찬우물(냉정)의 ‘우물 정(井)’자를 따서 화정으로 불리게 되었다. [효자동] 효자동에 조선 후기의 효자 박태성 부모님의 무덤이 있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하루도 거르지 않고 부모님의 묘소에 절을 했는데, 이때 많은 사람들이 박태성의 효성을 기리어 마을 이름을 ‘효자리’라고 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박태성의 무덤과 효자 정려비가 있습니다. 박태성의 묘와 효자 정려비는 고양시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참고링크고양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