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의 역사를 문화유산과
인물을 통해서 알아봅니다.
군포의 유래에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게 패하여 후퇴하던 승려 의병과 관군이 이곳에서 재정비하였는데, 이때 마을 사람들이 굶주린 관군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등 사기를 진작시켜 주었고, 이후 왜병을 크게 무찔렀다, 그 후부터 이 지역을 굶주린 관군이 배불리 먹은 지역이라 하여 군포(軍飽)라 하였으나, 시대가 변함에 따라 군포(軍浦)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 첫 번째 설이다. 두 번째는 군포천(軍浦川)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다. 군포 옆을 흐르는 하천이 군포천(軍浦川)인데, 군포천은 한강의 지류이며 안양천의 상류에 있어 옛날부터 수운을 이용하는 군포 포구로서 널리 알려져 왔다. 숙종 25년(1699)에 간행된 과천현 신수읍지와 과천지도에 군포천이라 표기되기 시작하여 광무 3년(1899)에 간행된 과천군읍지와 지도에도 군포천이라 표기되어 있어 여기에서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세 번째로는 군포(軍布)에서 군포(軍浦)로 개칭되었다는 추측이다.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기 한달 전인 정조13년(1789) 9월 능행에 관한 전반적인 사실을 편찬하도록 어명을 내렸다. 당시 편찬한 원행정례에 군포(軍布)라 기재되어 있는데, 조선시대 양인이 부담하던 국역(國役)을 말한다. 따라서 지금의 군포(軍浦)가 군포(軍布)에서 유래되었는지 추측은 할 수 있지만 현재로서 확인할 길이 없다. 네 번째는 청일전쟁때 청나라 군인들이 군함을 타고 한강을 거쳐 안양천을 경유 이곳에 머물렀다고 하여 군포(軍浦)라 했다는 설이다. 다음은 군포장역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지금의 안양시 호계3동의 구 군포지역에 군포장(軍浦場)을 개설하였는데, 당시 남면 당리에 역사를 지으면서 역명을 군포장역(軍浦場驛)이라 하였다. 이후 역사 인근이 번창하면서 안양시 호계3동의 군포장을 '구군포(舊軍浦)'라 했고, 군포장역 인근을 군포(軍浦)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 다섯 번째 설이다. 여섯 번째는 군웅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인데, 군웅산 아래있는 마을이 군포천의 물가 마을이므로 군웅산의 “군’ 자와 물가 “포’ 를 합하여 “군포’ 라고 이름을 붙였다는 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