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의 역사를 문화유산과
인물을 통해서 알아봅니다.
옛날 아산 땅(현 시흥시 능곡동?) 한 마을에 유씨가 살고 있었는데, 그 집안은 번족하기도 하거니와 아들을 14형제나 두었으며, 모두가 벼슬길에 올라 권세가 대단하여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유씨 노인은 인심이 고약하고 심술궂어 좋지 않은 소문이 나 있었다. 하루는 이 심술궃은 노인이 집안에 있는 한 종에게 매질을 몹시 하여, 심한 매를 맞은 종은 매에 못 이겨 그 자리에서 숨지고 말았다. 이때 죽은 종의 아들 하나가 16세였는데 이 광경을 목격하고, 그 길로 길을 떠나 집을 나가고 말았다. 어린 나이로 화가 나서 집을 뛰쳐나가긴 했으나 갈 곳이 없었다. 이곳 저곳으로 정처없이 돌아다니다가 금강산 어느 절에 들어갔다. 절에 들어가 잔심부름을 하며 여러 해를 지내니 매사 행동이 범상치 않아, 어느 날 절의 스님이 종의 아들에게, 소원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러자 아이는 풍수지리를 배우고 싶다고 하였다. 그로부터 스님은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던 어느날 스님은 장성한 청년에게 세상에 나가 배운 풍수지리를 활용하여 사람들을 깨우치는데 힘쓰라고 하였다. 그 길로 청년은 자기가 어렸을 때부터 살던 옛날 그 집으로 찾아가서 머물러 사랑방에서 자게 되었다. 10년이 훨씬 지난 후라 그 집에서는 아무도 그 청년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청년은 사람들을 다 알아볼 수 있었다. 저녁상을 물리고 사랑방에 앉아서 노인과 인근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중 화제를 풍수지리로 돌리며 앞산의 유씨네 조상묘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유씨 조상묘가 그야말로 명당 중의 명당지지(明堂之地)인데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앞쪽에 바라다보이는 군자봉 산봉우리가 문제라고 했다. 군자봉의 산봉우리가 지금보다 석 자 석 치만 낮았더라면 지금보다 더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들은 유씨는 다음날 인근 사람들을 모두 오라고 하여 청년이 말한 대로 한나절 안에 군자봉 봉우리를 석 자 석 치를 깎아내려 버렸다. 청년은 이에 그치지 않고 또 다른 것을 일러주었다. 산소 밑에 있는 신도비(神道碑)를 위치를 다소 바꾸고, 산소 옆에 있는 '벌바위'를 깨뜨려 버리되, 내가 떠난 지 한나절 후에 시행하라고 이르고, 그 다음날 일찍 청년은 길을 떠났다. 그 후 청년이 일러준 대로 신도비를 열 자 위로 끌어올리니 비석의 받침돌인 거북이(龜) 모양의 발이 위치한 곳에서 선혈(鮮血)이 쏟아져 나왔다. 또한 벌바위를 깨뜨리니 왕벌 두 마리가 바위틈에서 튀어나와 청년이 간 쪽을 향하여 날아갔다. 한편 청년은 그 길로 김포나루터로 가 용가마(무쇠솥)를 머리에 뒤집어 쓰고 있었는데, 왕벌 두 마리가 날아와서 총각이 뒤집어쓴 가마솥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머리를 쏜다는 게 무쇠를 벌침으로 쏘기 시작했으나 무쇠솥이 벌에 쐴 리가 없고, 한참만에 왕벌 두 마리는 기진맥진해서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총각은 벌이 죽은 것을 본 다음 솥을 벗어놓고, 김포나루를 건너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유씨 집안은 권세가 차츰 기울기 시작했다는 것이며, 지금도 군자봉은 당초보다 석 자 석 치 정도 낮아진 것처럼 보인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