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의 역사를 문화유산과
인물을 통해서 알아봅니다.

  • 명칭 : 생금집 전설
  • 위치 : 시흥
  • 시기 : 대한민국시기

죽율동에 '한배미'라는 마을이 있다. 댐은 '대암(竹栗)'이라고도 부르며, 한자로는 '대답(大畓)' 혹은 '대촌(大村)'이라고도 하는데, 대답이라면 '한배미', 즉 '큰 배미'란 뜻이다. 그런데 이 댐 마을에는 벌써 12대째 살고 있는 금녕김씨(金寧金氏) 댁이 있으며, 이 댁을 또한 '생금집'(죽율동)이라고 부르고 있다. 집에는 이야기가 전해내려고 있다. 그 날도 할아버지 김창권(金昌權)은 새벽부터 망설였다. 집 근처 산에는 이제 땔나무다운 거리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썰물로 갯물을 빠질 때 저 바다 건너 덕물도(옥구도)에 가본 적이 있는데, 그 역적산(옥구도에 있는 돌주리산을 지칭)에는 나무가 무성한 뿐만 아니라 삭은 나뭇가지가 많았고, 아무로 나무를 하러 오는 사람이 없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러나 막상 덕물도까지 나무하러 간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리도 멀 뿐만 아니라, 썰물 때를 잘 맞추지 않으면 당일로 되돌아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침 그날은 썰물 시간이 좀 긴 듯하니 생각난 김에 덕물도로 갈 작정이었다. 역적산 아래에 있는 유명한 생금우물가에 할아버지는 지게를 내려놓고 부지런히 삭은 나무등걸들을 모아들였다. 몇 아름 안아다가 지게 앞에 내려놓고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그때였다. 저 오른편 조금 굽이져 평평한 바닥에서 무엇인가 번쩍번쩍하는 것이 눈이 부시게 빛났다. 그 번쩍이던 것은 한 마리의 닭이었다. 노란, 샛노란 털을 가진 한 마리의 닭이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몸을 움직이기는 하나 걷지를 않는 것이었다. 눈이 부시게 빛나는 닭 한 마리가 움직이지를 못하여 가까이 가서 두 손으로 안았는데도 가만히 있었다. 자세히 보니 보통 닭과 달랐다. 그것을 보자기에 싸 집으로 가져왔다. 그런데 그때 보자기에서 꺼낸 후에 보니 보자기에 닭털 한 개가 빠졌는데 그것이 단단한 것이어서 이리저리 둘러보았으나 도무지 닭털 같지가 않았다. 금은방에 가져가니 그것을 금이라고 했다. 할머니와 이 이야기를 나누었고 할아버지는 화수분처럼 쏟아지는 황금 닭털을 그냥 계획 없이 쓰고 싶지는 않았다. 살림을 더욱 아끼고 씀씀이를 절약하면서 며칠에 한 차례씩 그 닭털을 들고 새로운 금방을 찾아다니면서 돈으로 바꾸었다. 그러는 사이에 누구 입에서부터 나왔는지 이런 소문이 떠돌기 시작하였다. "저 김씨 댁에는 황금닭을 얻었대", "아니 생금닭이래", "아니 황금알이래"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이 멋대로 떠드는 소문이었지만, 할아버지는 일절 그 말을 부인하고 있었다. 다만 말이란, "자네들도 열심히 일하고 돈을 아껴 쓰면 머지않아 나처럼 논도 사고, 밭도 사고, 또 집도 크게 짓게들 돼. 그뿐인가, 생금닭도 얻게 되지." 하는 것이었다. 그 후로 할아버지 댁은 아예 '생금닭'이란 댁호(宅湖)까지 붙게 되었고, 마을 사람들도 그러려니 하면서 자기들도 열심히 일하면 '생금집'처럼 잘 살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면서 모두가 열심히들 잘 살아보려고 노력을 하는 것이었다. 어느날 시집간 딸이 찾아왔다가 친정이 변한 것을 보고 놀라 그 황금닭을 훔쳐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확인하니 돌로 변해있었다. 이에 무엇인가 깨달은 딸은 그 길로 친정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튿날 저녁에서야 딸은 다시 돌아왔다. 그러고는 곧 사랑방으로 나가 친정아버지에게 엎드려 사죄하며 일시 눈이 멀어 저지른 죄였다는 것과 그것은 한낱 돌멩이에 불과하였다는 것을 고백하였다. 다시 할아버지는 온 집안식구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하고는, "그 동안 우리집을 '생금집'이라고 부르게 된 동기는 바로 이 돌멩이 덕이다. 나는 이것을 덕물도에 나무하러 갔다가 우연히 주워왔다. 그리고 그 덕을 톡톡히 보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는 처세나 살림을 호사스럽고 호탕하게 한 적은 없었다. 아마 이제 이 정도로서 우리 집안은 더 이상 이 돌의 덕은 보지 않아도 열심히 일하면서 잘 살게 된 것으로 알자." 고 하였다. 한편 친정아버지는 다시 시집으로 돌아가는 딸에게 서운함을 가시어 주려고 얼마간의 재산을 쪼개어 주면서, "이것을 바탕으로 더욱 열심히 일하여 가문을 융성케 하여라." 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 돌은 고이 싸서 신주처럼 모시었지만 다시는 광채가 나는 황금빛 닭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계기가 오히려 이 할아버지네 가족 구성원들에게뿐만 아니라 시집간 딸의 식구들에게도 일한다는 즐거움, 욕심내지 않고 분수에 맞게 살아가야 한다는 의식을 심어주게 되었고, 그 정신은 오늘날에도 이 '생금집'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생금집은 1994년 향토유적 제7호로 지정되었다.

참고링크시흥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