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소영

Q. 어릴 적 살았던 곳?

원래 정확히 따지면 실향민인데, 황해도에서 6.25 한 해 전에 우리 아버지가 인천으로 이사를 오셨어요.
제가 다섯 살 때 아마 온 거 같아요.
다음에 쭉 인천에서 살았지요, 고등학교 때까지.

Q. 고향에 대한 기억?

고향 기억은 그때 그저 학교 다니고 그냥 주위사람.
지금 풍경하고는 많이 다르지요.
그래도 집에 가면 어머니 친구들도 와서 이야기 같이 하시고.
아파트 생활하고는 전혀 다르지요.
그리고 아파트보다 유대 관계가, 가옥구조가 그러니까 유대 관계가 깊어질 수밖에 없지요.
나가면 골목에서 다 만나게 돼있고 그러니까.

Q. 남양주로는 언제 이주하시게 되셨나요?

남양주에는 우리 집 양반이 퇴직을 하니까 우리 집 양반이 뭐라 그러냐면 “우리가 전혀 이 서울에 살 필요가 없다.”
그때 농사짓는 사람들이 있고.
그래도 하늘에 별도 보이고 좋았어요.
우리가 온 지 한 11년쯤 되니까.
변화가 많지요, 아파트가 엄청 많이 늘었지요.
우리가 이사 올 때 한 다섯 배 정도는 지금.
제가 느끼는 거는 엄청난 속도로 발전을 했는데 모든 것이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짙은 법 아니겠어요.

Q. 예전과 비교했을 때 현재의 남양주?

나는 그 아파트라는 그 주거 형태도 마땅치가 않고, 주택 가옥 구조로는 산동네가 가장 좋지 않은가.
그런 생각 들어요.
왜 그러냐 하면, 거기는 골목이 있으면 옆집에서 김치부침개 하나도 혼자 못 먹어요.
나눠먹어야지, 다 냄새나고 해서.
그러니까 서로 외로운 게 없지요.
우울증도 없어요, 거기 사람들은. 여기 분들은 경제적으로 발전함과 동시에 ‘전 국민이 다 실향민이 되지 않았나.’ 그런 느낌이.
고향이 없어요, 우리는.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고향이 없잖아요, 지금.
고맙게 생각을 해요.
여기 경관이 이렇게 좋고, 공기도 좋고, 서로 주민들끼리 유대 관계도 있고.
일이라는 게 혼자 하면 일이지만, 여럿이 하면 재미가 되거든요.
여자들은 얘기, 김치 하면서도 열 살서부터 육십 대까지 얘기 다 해요.
김장도 얼마나 잘 하는지 몰라요.
김장도 공동으로 할 수 있는 거 그런 거를 시에서나 아파트 같은 데다 하나 하면 굉장히 난 좋을 거 같다고 생각을 해요.

Blog Sing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