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일: 1864.06.22
사망일: 1950.12.20
행위분야: 자본가
인물경력
- 1882년 무렵 송파장에서 포목 행상을 시작해 1896년 무렵부터 배오개에 포목상점을 개설하면서 거상으로 성장.
- 1900년 12월 성진감리서 주사, 1905년 4월 중추원 의관 역임.
- 1905년 7월 한성상업회의소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 1906년 1월 상의원, 1909년 상임위원을 역임. 이와 함께 1905년 7월 광장주식회사 발기인과 취체역, 1906년 11월 합명회사 창신사 발기인, 1907년 8월 합명회사 공익사(公益社)를 설립 사장취임.
- 1914년 11월 합명회사인 공익사를 주식회사로 개편하고 사장에 취임.
- 1918년 경성포목상조합 조합장에 추대. 1919년 3월 고종의 국장(國葬)때 상인봉도단(商人奉悼團) 단장을 맡음. 같은 달 만주 공익사를 설립하고 감사역을, 그해 9월 직물상공제회 회장, 11월 조선경제회 발기인과 취체역, 1920년 1월 동양염직주식회사 취체역을 지냄.
- 1921년 6월과 7월 조선인산업대회 발기 준비위원과 지방위원, 10월 경성곡물신탁주식회사 감사역을 맡음.
- 1925년 2월, 배오개에서 설립했던 상점을 주식회사 박승직상점으로 개편하고 사세를 확장. 1926년 10월 순종의 국장 때도 상인봉도단을 이끌었고, 1927년 3월 이상재(李商在)사회장 준비위원에 선임.
- 1930년 2월 경성상공협회 회장에 선출, 이후 1931년 10월 중앙일보사 취체역, 1933년 12월 쇼와(昭和)기린맥주주식회사 주주와 취체역, 같은 해 경성창고금융주식회사와 조선직물주식회사 감사역 등으로 활동.
- 1934년 2월 경성상공회의소 회장 선출.
- 1941년 3월 박승직상점을 미키(三木)상사주식회사로 개편하고 사장에 취임.
친일행적
- 1909년 11월 안중근에게 처단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추도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대추도회의 발기인과 위원을 맡음.
- 1922년 11월 조선실업구락부 발기인으로 참여해 이후 평의원 등의 임원을 지냄.
조선실업구락부는 1920년 3월 한상룡(韓相龍) 등 유력 경제인들이 친목을 도모하고 ‘일선융화(日鮮融和)’를 철저히 하기 위해 결성한 단체임.
- 1923년 10월 교육실천회 특별회원을, 1924년 4월 반일운동 배척과 일선융화를 표방하던 친일단체 동민회(同民會)의 평의원에 선임.
- 1938년 1월 1일 신년을 맞이해 매일신보가 사회 저명인사들을 초청해 ‘조선인의 진로와 각오’라는 주제로 마련한 좌담회에서 중일전쟁의 책임은 전적으로 중국에 있음을 강조하는 한편, 조선인들이 보여준 거국일치의 ‘애국정신’에 찬사를 보냄. 이어 조선총독부의 시정(施政)이 적절하므로 개선이 전혀 필요 없음을 강조. 같은 해 2월 조선지원병제도제정축하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매일신보 2월 23일자에 지원병 제도 실시를 축하하는 담화를 통해 지원병제도 실시는 내선일체(內鮮一體)의 구현이 며, 조선인도 제국 신민으로서 의무와 권리를 갖추게 되었다며 환영. 같은 해 8월 전시체제를 강화하고 조선인의 전쟁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조직한 최대 관변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인으로 참여해 평의원에 선임, 국민정신총동원 경성부연 맹 상담역을 맡음.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확대 개편한 뒤에도 1940년 10월 평의원을수행.
- 1939년 11월 일제가 전시체제 강화와 유도황민화(儒道皇民化)를 위해 조직한 조선유도연합회(朝鮮儒道聯合會)의 평의원에 선임, 1940년 6월 경성경제통제협력회의 상임이사에 위촉.
- 1941년 12월 경성부 총력과를 직접 방문해 해군 국방헌금으로 1만 원을 헌납.
1943년 2월 방공협회를 통해 방공감시대 위문금 100원을, 5월 육군에 국방헌금 200원을 헌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