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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담(魚潭) = 서천담일(西川潭一)

출생일: 1881.05.07 사망일: 1943.07.05 행위분야: 중추원 인물경력 - 1893년 한성사범학교 소학교에 입학.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제1차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자 친족인 탁지부대신 어윤중(魚允中)의 추천을 받아 관비유학생에 선발되어 일본으로 유학. - 1895년 4월부터 약 2년간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서 일본어를 배운 다음 세이조(成城)학교를 거쳐 1898년 12월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 - 1899년 11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제11기로 수료한 후 1900년 6월까지 일본군 야전 포병 제1연대에서 견습사관을 지냄. 7월 한국군 포병 참위(參尉 : 소위)로 임관한 다는 사령장을 받았지만 귀국하지 않음. - 1901년 초 귀국 후 4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교관에 임명. - 1931년 11월 단군성전의 유지와 제사봉행 등을 목적으로 조직된 단군신전봉찬회 고문을 맡음. 친일행적 -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 진북군(進北軍) 접응위원을 맡아 일본군 제12사단의 숙영지를 확보하는 역할을 수행. 서울 남대문 밖을 일본군 숙영지로 주선하고, 일본군의 북진에 따라나서 의주 등으로 돌아다니며 보급품 징발에 앞장섬. 이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정부로부터 은사금 700원을 받음. 4월 포병 부위(副尉), 7월 포병정위(正尉), 9월 포병 참령(參領)으로 진급. - 1905년 4월 포병 부령(副領)으로 진급, 5월 대한제국정부로부터 훈4등 태극장을 받음. 이후 군부(軍部) 참모국원을 거쳐 시종무관을 지냄. 1906년 5월 일본 정부로부터 훈4등 욱일소수장을 받았으며, 같은 달 일본 군무(軍務) 시찰을 다녀옴. 같은 해 10월 26세의 나이로 포병 정령(正領)으로 진급. - 1909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군부를 폐지하자 새로 설치된 친위부(親衛府)에 소속. 강제병합 후 조선주차군사령부에 배속. -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1915년 11월 다이쇼(大正)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음. - 1920년 4월 구한국 장교를 일본군 장교로 전환하는 칙령에 따라 일본군 육군 포병대좌로 임명되는 한편 훈3등 서보장(瑞寶章)을 받음. 같은 달 23일부터 의친왕(義親王) 이강공부(李堈公附) 무관으로 근무. 12월에 다이쇼(大正)3년~9년 전역(戰役)종군기장을 받음. - 1921년 대한독립단이 국내 지단(支團)을 설치한 뒤 독립을 목적으로 선언문을 배포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하자, 이를 경찰에 밀고하여 독립운동가 김기한(金起漢)•강지형(姜芝馨) 등을 체포하는 데 협력. - 1922년 9월 일본군 육군 소장으로 진급. - 1928년 11월 쇼와(昭和)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고, 1929년 7월 훈2등 서보장을 받음. - 1930년 12월 일본군 육군 중장으로 진급. - 1931년 4월 대한제국 군인 출신들로 구성되어 이왕궁(李王宮)의 수비와 의장을 맡았던 친위부 소속 조선보병대(朝鮮步兵隊)가 폐지될 때 예편. 같은 해 5월 특별상여금 3220원, 퇴직특별은사금과 수당으로 1만 590원을 받음. - 퇴역 후 각종 친일단체에 가담.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10월 갑자구락부(甲子俱樂部)에서 주최한 전선시국대회(全鮮時局大會)의 선전계를 맡아 활동, 같은 달 27일에는 예비역 중장 조성근(趙性根) 등과 만몽재주동포후원회(滿蒙在住同胞後援會)를 조직하여 평의원장을 맡음. - 1934년 4월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칙임관 대우 참의에 임명되어 1943년 7월 사망할 때까지 세 차례 연임하면서 매년 1800원의 수당을 받음. - 1934년 11월 천도교 신파의 영수인 최린(崔麟) 등이 “대세(大勢)에 합류하여 실질적 향상을 도모하고 조선 민중의 신생활 신문화로 신흥조선을 건설”하며, “일본 민족과 혼연일체가 되어, 어느 방면으로나 잘 일치합작하여 나아감으로써 우리의 자립적 실력을 확충”한다는 구실로 만든 친일단체 시중회(時中會)의 평의원으로 활동. - 1935년 10월 시정25주년기념표창과 은배 1개를 받음. - 1935년 중추원 회의에 참석해 조선인에게도 병역의무를 부과할 것을 강조했고, 1938년 2월 23일자 매일신보에서 지원병제도가 실시되는 것은 ‘반도 통치사상 금자탑(金字塔)’이라고 찬양하며 하루빨리 징병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 - 1939년 영국 타도를 주장하며 전국적 차원에서 적극적인 배영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결성된 배영동지회(排英同志會)의 이사와 상담역을 지냄. 이해 11월 조선총독부가 전시체제 강화와 유도황민화(儒道皇民化)를 위해 전 조선 유림을 동원해 조직한 조선유도연합회의 평의원으로 활동. - 1940년 11월 열린 기원2600년 축전 기념식전 및 봉축회에 초대받고 기원2600년 축전기념장을 받음. - 1941년 9월에는 조선인의 전쟁협력을 위해 임전대책협력회와 흥아보국단을 통합하여 결성한 전시체제기 최대의 민간 친일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경성)으로 참여해 조선에서도 지원병제와 징병제를 실시할 것을 적극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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