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일: 1844.06.10
사망일: 1932.11.13
행위분야: 조선귀족
인물경력
- 1875년 2월 사마시(司馬試)에, 1876년 3월 충량문과(忠良文科)에 합격. 같은 달 홍문관 교리로 관직에 진출해 1879년 4월 돈녕도정(敦寧都正)에, 1880년 9월 사간원대사간에, 1885년 5월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
- 1887년 11월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되었고, 1889년 1월 이조참판을, 1890년 1월 사헌부 대사헌을 지냄.
- 1892년 8월 다시 이조참판에 임명된 후 형조•이조•예조참판 등을 거쳐 1894년 6월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에 임명. 조선 정부의 철병 요구를 거부한 일본 정부가 공사 오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를 앞세워 조선의 내정개혁을 요구하자 같은 달 남산에서 열린 노인정회담(老人亭會談)에 조선 측 내정개혁조사위원으로 참여. 김홍집(金弘集) 내각이 성립되면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 회의원(會議員)에 임명.
- 1895년 3월부터 궁내부 협판으로 궁내부대신 사무를 서리하고, 1896년 2월부터 1907년 5월까지 여러 차례 궁내부 특진관을 지내면서 1898년 10월 중추원 1등 의관에, 1899년 3월 태의원경에 임명.
- 1896년 6월 최초의 근대은행인 조선은행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 7월 이완용(李完用)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해 위원에 선출. 1897년 1월 사립 한성은행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초대은행장으로 취임.
- 1898년 음력 7월 사립 한성의숙(漢城義塾) 숙장(塾長)으로 취임. 1899년 4월 한성의숙을 개칭한 사립 낙영(樂英)학교 교장으로 취임. 같은 해 5월 궁내부철도용달회사(宮內府鐵道用達會社)를 설립해 부사장에 임명.
- 1900년 1월 함경북도관찰사에 임명되어 함경북도재판소 판사를 겸임했고, 3월 함경남도관찰사로 전임해, 4월부터 1902년 4월까지 함경남도재판소 판사를 겸임.
- 1903년 2월 한성은행이 자금 부족과 경영 부실 등의 이유로 공립 한성은행으로 개편되자 왕족인 이재완(李載完) 등과 함께 공립 한성은행 설립발기인으로 참여. 12월 부장(副長 : 부은행장)으로 취임. 같은 해 8월 함경남도관찰사로 재임하면서 사창(社倉)의 환곡(還穀)과 관련해 일어난 소요를 진압하지 못한 책임으로 징역 3년형에 처해짐.
- 1904년 1월 특사로 풀려나 7월 진황지(陳荒地) 개간 등을 목적으로 설립된 한국농광회사(韓國農鑛會社)의 발기인으로 참여해 취체역.
- 1905년 6월 광장회사(廣長會社) 사장으로 취임하고, 10월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 회장에 선출되는 한편 주식회사 한성은행 주무원(主務員)으로 부장(副長)을 겸임.
- 1906년 4월 교과서 인쇄와 출판을 목적으로 설립된 광학사(廣學社) 사장에 취임했고, 5월 주식회사 한성은행 감사역에 선임되어 1908년 1월까지 활동. 9월 대한연초(大韓烟草)주식회사 발기인으로 참여.
- 1907년 3월 대동문우회(大東文友會)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4월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國債報償志願金總合所)를 설립해 부소장을 지냄. 같은 해 5월 판돈녕사사(判敦寧司事)에 임명되었고, 7월 함경남도관찰도 함흥의 유지인 주장겸(朱璋謙) 등이 설립한 패향(沛鄕)학교 교장으로 취임. 10월 한국 시찰을 위해 방문하는 일본 황태자를 환영하기 위해 조직된 신사회(紳士會)에 이근명(李根命)•민영규(閔泳奎)•민영휘(閔泳徽) 등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 11월 규장각 지후관(祗候官)에 임명.
- 1908년 9월 기호흥학회 수원군지회 회장을 지냄.
- 1909년 3월 실업연구회가 경제 연구와 실업 발달을 표방하면서 경제연구회(經濟硏究會)로 개편되자 부총재에 선출. 4월 일본관광단(日本觀光團) 단원으로 도일(渡日)해 일본의 주요 공업기관과 교육기관 등을 시찰하고 귀국. 5월 농업 발전을 도모한다는 목적으로 김윤식(金允植)•이도재(李道宰) 등과 함께 농사조합소(農事組合所) 발기인으로 참여. 7월 전국의 진황지를 개척할 목적으로 설립한 삼성농장회사(三晟農庄會社) 총재에 선출되는 한편, 윤덕영(尹德榮)•이용태(李容泰) 등과 함께 전국 광부들의 구제 등을 목적으로 광부구제회(礦夫救濟會, 일명 광산역군구제회[礦山役軍救濟會])를 조직.
- 1910년 3월 대동교회(大同敎會)에 의연금을 출연.
- 1910년 5월 이재극(李載克)•이재곤(李載崑) 등과 함께 수산업 경영을 목적으로 대륭어업회사(大隆漁業會社)를 설립.
- 1912년 2월 후작 박영효(朴泳孝)•남작 박기양(朴箕陽) 등과 함께 조선권업(朝鮮勸業)주식회사를 발기하고 9월에 설립.
- 1913년 4월 박영효•남작 이재극 등과 함께 무역업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무역주식회사 발기인으로 참여해 7월 회사를 설립.
- 1919년 1월 고종 국장(國葬) 때 산릉주감(山陵主監) 제조(提調)에 이어 6월에는 국장의궤(國葬儀軌) 편찬 고문에 임명. 같은 해 7월 주식회사 동익사(東益社)를 설립해 중역을 맡았고, 12월 종4위로 승서(陞敍).
- 1921년 1월 유도진흥을 목적으로 한 조선유도사(朝鮮儒道社)를 설립해 총재에 선출, 2월 부묘주감(祔廟主監) 제조에 임명. 같은 해 4월 주택난에 빠진 빈곤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설립된 주택구제회(住宅救濟會)에 박영효 등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 주택구제회는 다음 해 12월 재단법인 보린회(保隣會)로 개편.
- 1922년 1월 선만(鮮滿) 개척과 재외동포 생활향상 등을 목적으로 남작 성기운(成岐運) 등과 함께 선만협회(鮮滿協會)를 창립발기하고 회장을 맡음.
- 1925년 5월 박기양•자작 민병석(閔丙奭) 등이 공맹(孔孟)의 교리를 보급하고 유교적 가치관과 세계관을 함양하기 위해 조직한 유교단체인 모성공회(慕聖公會)의 회장으로 활동.
- 1926년 4월 산릉주감(山陵主監) 제조에 임명.
- 1930년 1월 도박•아편 등으로 몰락해가는 조선귀족들의 파산을 구호하기 위해 1929년 9월 조직된 재단법인 창복회(昌福會)에서 지급한 교부금 150원과 60세 이상 에 한해 3할 추가로 지급한 50원을 합해 200원을 받음.
- 1931년 11월 단군성전의 유지와 제사봉행 등을 목적으로 조직된 단군신전봉찬회(檀君神殿奉贊會)의 고문에 추대.
- 1932년 6월 공자(孔子)를 숭배하고 신학(新學)을 배격한다는 목적으로 조직된 유림단체인 대성원(大聖院)의 원장을 지냄.
친일행적
- 1908년 2월 대동학회(大東學會) 회원으로 활동. 대동학회는 1907년 2월 유림계를 회유하기 위해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후원으로 조직.
- 1909년 7월 단군과 조선의 태조 및 일본 천황가의 시조(始祖)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낸다는 목적으로 조직된 신궁봉경회(神宮奉敬會)의 고문에 추대. 8월 축양회사(畜養會社)를 설립하고, 9월 김재순(金在珣)이 신궁봉경회를 탈퇴해 단군과 일본 진무천황(神武天皇)의 위패 봉안과 의식 거행을 위해 신궁경의회(神宮敬義會)를 조직하자 고문에 추대. 같은 달 말 은퇴한 후 경기도 수원에 거주하면서 11월 수상조합소(水商組合所) 총재를 지냄. 같은 해 12월 일진회(一進會)가 ‘합방청원서’를 발표하자 반대하고 총리대신 이완용을 중심으로 정치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조직한 국민연설회에 발기인으로 참여.
- 1910년 4월 이완용•조중응(趙重應) 등의 주도로 합병찬성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고희준(高羲駿)•민원식(閔元植) 등과 함께 조직한 정우회(政友會)의 총재와 대한수상조합소(大韓水商組合所)의 총재에 선임.
- 1910년 7월 일진회의 ‘합방청원서’에 찬성하고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조직된 국민협성회(國民協成會)의 합병실행 추진단체인 한국평화협회(韓國平和協會)의 재무부 총장에 선출. 같은 해 9월 경무총감부에서 일진회•국민동지찬성회(國民同志贊成會)•합방찬성회(合邦贊成會)•진보당(進步黨)•정우회 등 10개 정당단체의 대표들을 불러 단체 해산령을 발표할 때 정우회 대표로 참석해 해산을 결정. 같은 달 대한수상조합소가 경성수상조합소(京城水商組合所)로 개편되자 고문에 추대.
- 강제병합 직후인 1910년 10월 「조선귀족령」에 따라 남작 작위를 받음. 같은 달 조선귀족관광단(朝鮮貴族觀光團)의 일원으로 나고야(名古屋)•도쿄(東京)•교토(京都) 등지를 시찰하고 귀국. 일본에 체류 중이던 11월 3일 일본 천황에게서 주병(酒甁)을 받음.
같은 해 12월 백작 이완용•자작 조중응 등과 함께 조선귀족의 실업(實業)을 발전시킬 목적으로 명농회(明農會)를 조직.
- 1911년 1월 은사공채 2만 5000원을 받았고, 2월 총독 관저에서 거행된 ‘작기본서봉수식(爵記本書捧受式)’에 의복을 갖추어 참석. 같은 해 4월 사단법인 조선귀족회(朝鮮貴族會)를 조직하고, 9월 남작이사에 선출. 조선귀족회는 작위를 받은 조선 귀족들이 천황의 ‘성은에 감읍’하고 ‘사회의 모범’이 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조직.
-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고, 12월 정5위에 서위.
- 1915년 11월 다이쇼(大正)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음.
- 1928년 11월 쇼와(昭和)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