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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완(李載完)

출생일: 1855.12.05 사망일: 1922.08.11 행위분야: 조선귀족 인물경력 - 장헌세자(莊獻世子 : 思悼世子)의 현손. 자작 이재곤(李載崐)의 친형. 흥선대원군의 둘째 형 흥완군(興完君) 이정응(李晸應)의 양자로서 고종과는 사촌 간. 1899년 9월 완순군(完順君)에 봉작. - 1875년 4월 별시 병과(丙科) 20위로 합격하여 그해 6월 승정원 가주서를 시작으로 1876년 4월 예문관 검열(檢閱), 1877년 8월 동부승지, 1878년 1월 안동부사를 거쳐 1880년 2월 이조참판에 오름. 1881년 8월 도승지, 1884년 10월 예조판서와 교섭통상사무협판, 1885년 4월 형조판서, 1886년 1월 홍문관 제학을 지냄. - 1890년 10월 한성부 판윤, 1891년 8월부터 1892년 12월까지 이조판서•예조판서•판의금부사, 1894년 6월 의정부 좌참찬 등을, 1895년 5월부터 1899년 3월까지 세 차례 궁내부 특진관을 지냄. - 1896년 1월부터 1899년 3월까지 종정원경•귀족원경•경효전 제조, 6월 궁내부대신, 1904년 8월까지 평식원(平式院) 총재•판돈령원사를 겸임, 표훈원 의정관에 임명. - 1903년 2월 설립된 공립한성은행(公立漢城銀行)의 발기인으로 참여. - 1907년 4월 육군 부장을 거쳐 8월부터 11월까지 승녕부(承寧府) 총관을 지냄. - 1908년 8월 기호흥학회 찬무원(贊務員)으로 참여. - 1918년 8월 경성구제회(京城救濟會)에 기부. - 1919년 1월 고종의 장의(葬儀) 고문으로 행장제술원(行狀製述員)을 맡음. 친일행적 - 1903년 3월 경의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기 위해 일본 정부의 밀명을 받은 일본공사관 소속 무관 노즈 쓰네다케(野津鎭武)와 밀의하여 경의철도 부설에 관한 각서를 교환하고 고종에게 초안을 제출하여 윤허를 받음.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의 추천으로 대한철도회사 사장에 임명되었고, 영남지역의 철도지선(支線)도 일본이 부설할 수 있도록 권리를 넘김. - 1904년 9월 한일 양국인의 친목과 융화를 도모하여 반일 정서를 완화시킬 목적으로 조직된 대동구락부(大東俱樂部) 회장에 선출. - 1905년 10월부터 주식회사 공립한성은행장에 취임하여 일본 제일은행권을 전국에통용시키는 데 앞장. - 1905년 12월 러일전쟁 승전 축하와 ‘을사늑약’ 체결을 위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특명전권대사로 방문한 것에 반례(返禮)하기 위해 보빙대사로 일본에 파견. - 1906년 1월 일본 정부가 주는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旭日桐花大綬章)을 받음. 같은 해 7월 진황지 개간•삼림채벌•광산채굴 등을 위해 설립된 식산장려회사(殖産奬勵會社) 총무장을 맡음. - 1908년 2월 유림계를 회유하기 위해 통감 이토의 후원으로 조직된 대동학회(大東學會)의 회원 참여. 같은 해 10월 일본적십자사가 주는 특별사원장을 받았고, 11월 통감부 시기 전국의 산림 측량 등을 목적으로 설립된 대한산림협회의 총재를 맡음. - 1909년 7월에 1907년 10월 일본 황태자가 한국을 시찰할 때 환영 및 편의 제공 기여 공로로 일본정부로부터 일본황태자도한기념장(日本皇太子渡韓記念章)을 받음. - 1910년 10월 「조선귀족령」에 따라 후작 작위를, 1911년 1월 은사공채 33만 6000원을 받음. 은사공채를 수령한 조선인들이 현금으로 교환해 줄 것을 요구하자 일본정부는 이를 주식으로 전환해 은사공채 투자은행으로 지정된 한성은행에 예치토록했는데, 은사공채 대부분을 한성은행에 투자하여 상당한 금액의 이자소득을 얻음. - 1911년 2월 총독 관저에서 열린 작기본서봉수식(爵記本書捧受式)에 의복을 갖추어 참석.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고, 12월 정4위에 서위. - 1915년 9월 조선총독부 주도로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 시정사업을 선전하기 위한 시정5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에 특별유공회원으로 기부, 11월 다이쇼(大正)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음. - 1925년 10월 기록된 사이토문서(齋藤實文書)의 「조선귀족 약력」에는 이재완을 다음과 같이 평가. “씨는 학식과 명망이 높아 이태왕 전하의 신임이 두터우므로 1899년경 경성 주재 일본공사관부 무관 노즈 대좌는 일찍이 이에 착안하여 일한 외교의 친밀을 도모하기 위해 씨에게 사람을 보내 개인적으로 친교를 맺고 자주 왕래하여 세계의 대세에서 일한관계는 지세(地勢)•인종•문학상 순치보거(脣齒輔車)의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임을 말하며 크게 양해를 얻은 후 일한 외교상의 커다란 효과를 올렸다. 즉 제일은행권을 발행하여 전 조선에 통용시킨 것도 이 사람이고, 현재 경성의 대은행인 한성은행의 기인(起因)도, 한국 도량형을 일본과 일치시킨 것도, 경의철도 부설권을 일본에 준 것도, 영남지선(嶺南支線) 철도 부설권을 제일은행에 준 것도 모두 이 사람이었다. 실로 일본에 대한 공로가 커서 노즈 무관의 활동 또한 경탄할 만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때는 러일전쟁 이전으로 일한관계가 가장 험악했던 시기였다. 따라서 노즈 대좌는 일찍이 이 씨가 금전에 무한한 욕심이 있는 것을 간파하여 이처럼 대성공을 이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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