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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석(芮宗錫) = 초내종석(草內宗錫)

출생일: 1872.05.14 사망일: 1955.05.12 행위분야: 정치사회단체 인물경력 - 1894년 전우학교(電郵學校)를 졸업한 뒤, 전우국(電郵局) 주사로 관직에 진출하여 중추원 의관, 관내부(官內府) 전선사감(典膳司監) 등을 지냄. - 1906년 동양용달회사(東洋用達會社)를 설립. - 1911년 남대문시장 관리인을 지냈고, 1912년부터 1914년까지 경성상업회의소 정의원(定議員)을 역임. - 1918년부터 1933년까지 조선지(朝鮮紙)주식회사 이사와 사장을 지냄. 1920년 12월 조선인 정동총대연합회(町洞總代聯合會) 회장을, 1919년부터 1923년까지 경성상공회의소 의원을 지냄. - 1919년 12월 북선흥업(北鮮興業)주식회사를, 1920년 1월에는 약업(藥業)주식회사를 연이어 설립하고 경영. 이외에도 경성융흥(京城隆興)주식회사, 조선권업신탁주식회사, 영흥탄광주식회사 등 여러 회사에서 이사와 감사를 지냄. - 1920년 3월 조선일보 창간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같은 해 8월까지 발행인 겸 부사장을 지냄. - 1921년 경성도시계획연구회 간사, 1923년 4월 경성상공조합연합회 부회장으로 활동. - 1925년 5월 조선불교단 이사와 평의원을, 1928년 조선박람회 경성협찬회 발기인과 이사를, 1929년 5월 조선박람회 평의원을 지냄. - 1929년 경성금은세공상조합(京城金銀細工商組合) 조합장을, 1930년 11월 경성상공협회 상담역을 맡음. - 1935년 10월부터 1939년 12월까지 조선제사(朝鮮製絲)주식회사 취체역과 사장을, 1936년 11월 경성 중앙도매시장 개설조사위원을, 1937년 삼흥상회(三興商會)주식회사 취체역을 지냈다. - 1939년 경성중앙청과주식회사 감사역과 동광생사(東光生絲)주식회사 부사장을 지냈으며, 1941년 3월 조선권번주식회사(朝鮮券番)주식회사 이사에 취임한 뒤 1942년 5월 대표이사직을 맡음. 친일행적 - 1907년 7월 일본의 조선통치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홍보하기 위해 조직된 국시유세단(國是遊說團)의 발기인과 국시유세단발기회 규칙제정위원을 지냈고, 1910년 8월에는 사무간사로 활동. - 1908년 5월 한성부민회(漢城府民會) 창립위원으로 활동했고, 1909년 11월 한성부민회에서 발기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국민대추도회 설행위원(設行委員)을 맡음. - 1909년 12월 일진회가 주도하는 ‘합방’을 저지하고 총리대신 이완용을 중심으로 ‘병합’을 추진하기 위해 만든 단체인 국민연설회의 회계로 활동. - 1914년과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의 발기인•상의원(商議員)•이사. 1914년 10월 경성신사대제(京城神社大祭) 신여경위계(神輿警衛係)와 유길준 추도회(兪吉濬追悼會) 간사로 활동. 11월에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본군의 칭다오(靑島)함락을 축하하기 위한 승첩축하회(勝捷祝賀會) 간사장으로 활동. 1915년 경성신사(京城神社) 씨자총대(氏子總代)와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 평의원으로 활동. - 1916년 조중응(趙重應)을 중심으로 전직 관료와 귀족•실업가 등이 일선융화(日鮮融和)를 표방하며 대정친목회를 결성할 때 발기인으로 참여. 이후 1942년까지 간사•이사•회장 등을 역임하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 - 1917년 매일신보사 주최 남북만주시찰단에 참가. - 1919년 3•1운동 당시 대정친목회를 중심으로 자치단을 조직하여 시위반대운동을 주도하며, 고향인 연천군에서 3•1운동은 천도교와 예수교 선교사가 신도 수를 늘리기 위해 조선인을 선동•교사하여 일으킨 것이라면서 “불령한(不逞漢)들에 대해 들으면 속히 경무관헌에게 신고해야” 한다고 연설. - 1920년 11월 경성부 부협의회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된 이래 1929년 11월까지 경성부 부협의회원(민선)으로 활동했고, 1931년 5월에는 경성부 부회의원으로 당선. - 1921년 3월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참의 후보로 추천받았으나 임명되지는 않음. - 1924년 3월 당시 대표적인 11개 친일단체가 만든 연합체인 각파유지연맹(各派有志聯盟)에 대정친목회를 대표하여 발기인으로 참여. 같은 해 9월 조선의 독립불가론을 바탕으로 참정권청원운동을 주도했던 갑자구락부의 간사로 활동한 이래 1937년까지이 단체의 주요 임원으로 활동. - 1925년부터 반일운동 배척과 일선융화를 표방한 동민회(同民會)의 평의원을 지냈으며, 1933년과 1937년에 이사로 활동. 1928년 11월 쇼와(昭和)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음. - 1931년부터 1939년까지 김포수리조합 조합장을 지냈다. 1934년 대아시아주의 황도사상(皇道思想) 단체인 조선대아세아협회 상담역으로 활동. - 1937년 경성군사후원연맹 결성위원과 평의원을 맡았으며, 이듬해 2월 조선지원병제도제정축하회 발기인으로 참여. - 1939년 11월 조선총독부가 전시체제 강화와 유도황민화(儒道皇民化)를 위해 전 조선 유림을 동원하여 조직한 조선유도연합회(朝鮮儒道聯合會)의 평의원을 지냄. - 대한제국 시기부터 1910년대까지 대표적 친일인물인 자작 조중응을 최측근에서 보좌하면서 실업계와 사교계의 거물로 성장. 이 때문에 조중응에게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었으며, ‘소조중응(小趙重應)’으로 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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