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일: 1869.09.21
사망일: 1950.08.20
행위분야: 중추원
인물경력
- 1895년 3월 관비유학생으로 도일하여 1896년 7월 게이오의숙(慶應義塾) 보통과를, 1897년 4월 고등과를 졸업.
- 1898년 10월 도쿄(東京)제국대학 법과대학 선과(選科) 입학, 1902년 7월 졸업.
- 1902년 10월부터 1903년 3월까지 도쿄제국대학 대학원에서 행정법 전공.
- 일본 유학 중 1897년 5월부터 12월까지 일본 사법성에서 사법행정사무를 견습.
- 1898년 1월부터 10월까지 도쿄부(東京府) 가나카와현(神奈川縣) 요코하마항(橫濱港)지방재판소와 검사국에서 사무견습으로 근무. 이어 1902년 11월부터 1903년 3월까지 대장성(大藏省) 총무국에서 사무견습 및 사무촉탁으로 근무.
- 1903년 3월 학부 훈령으로 귀국.
- 1904년 8월 궁내부 어공원(御供院) 주사로 임용. 같은 해 10월 궁내부 제실제도정리국 비서를 거쳐 1905년 1월 궁내부 소관 각궁각사(各宮各司) 세부(稅簿)조사위원, 12월 학부 참서관을 맡았다. 1906년 3월까지 외국어학교 교장을 겸직.
- 1907년 3월 학부 편집국장으로 승진하고 5월부터 관립 한성사범학교 교장을 겸직. 같은 해 7월 국문연구소 위원에 위촉되고 한성부윤에 임명.
- 1908년 1월 기호학회 평의원을, 2월 대동학회 회원, 3월 법학협회 회장, 5월 대한학회 발기인, 8월 기호흥학회 평의원을 맡음.
- 1929년 5월 조선박람회 평의원, 1931년 1월 조선수산회 부회장, 2월 경성도시계획 연구회 간사, 11월 단군신전봉찬회 고문, 1932년 2월 조선교육회 부회장에 선임.
친일행적
- 1907년 10월 대일본(제국)황태자전하봉영(奉迎) 한성부민회 위원장을 맡음. 같은 해 11월 일본 정부로부터 훈3등 서보장의 패용을 허가받았으며, 일진회가 일제의 의병 탄압조직인 자위단을 후원하기 위해 조직한 자위단원호회의 회장으로 활동.
- 1909년 5월 한일인대친목회 발기를 주도하였고, 7월 일본 정부로부터 황태자도한 기념장의 패용을 허가받음. 11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죽음을 애도하는 관민추도회에서 설행위원 겸 제수(祭需)담임위원을 맡음.
- 1910년 10월 평안남도 참여관에 임명. 1911년 1월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 평양지부 간사에 위촉.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음.
- 1914년부터 1917년 6월까지 평안남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위원을 맡아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 협력. 1915년 8월 매일신보사가 주최한 가정박람회 찬조원을 지냈고, 그해 11월 다이쇼(大正)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음.
- 1917년 6월 충청북도장관으로 승진, 1918년 충청북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
- 1919년 3•1운동의 원인을 민족자결의 취지를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도장관 유고(諭告)를 발표. 유고에서 민족자결은 조선에 해당되지 않는데도 “조선 각 지방에서 이 민족자결의 진의를 오해하며 혹은 고의로써 곡해하야 세상을 미혹케 하며 훤화(喧譁)를 야기하야 자기를 이롭게 하는 불령의 도배가 다유(多有)”하다면서, 이러한 행위는 옛 국법이 금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엄중처벌할 것임을 강조.
- 1919년 8월 조선총독부 지방관제 개정으로 충청북도지사로 개정. 1920년 7월 훈2등 서보장을 받았고, 고등관 1등으로 승급.
- 1921년 2월 총독관방 외사과 사무관으로 발령받아 3월부터 근무했으며, 주로 민정시찰을 담당. 같은 해 9월 조선중앙위생회 위원에 위촉.
- 1922년부터 조선총독부 철도부 공무과 사무관으로 근무.
- 1924년 12월 전라남도지사에 임명되어 전라남도농회 회장을 겸직.
- 1925년 5월 “조선불교에 대한 영향력 강화, 내선융화 보조, 조선인의 사상통제”를 목적으로 결성된 조선불교단의 상담역을 맡음.
- 1926년 8월 관계를 떠남과 동시에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칙임관 대우 참의에 임명되어 1929년 8월, 1932년 8월, 1935년 8월, 1938년 8월, 1941년 8월, 1944년 8월 등 여섯 차례 연임하면서 해방될 때까지 재임. 중추원 참의로 재임하면서 매년 2000원의 수당을 받았으며, 1944년 8월부터는 2600원으로 수당이 오름.
- 1926년 말에는 반일운동에 대항하기 위해 일선융화를 표방하고 조직한 내선융화단체인 동민회(同民會)의 평의원으로 활동.
- 1928년 11월 쇼와(昭和)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음.
- 1932년 2월 중추원 참의들과 함께 만주로 가서 만주 동포와 일본의 만주침략전쟁에 출정한 군인을 위문. 같은 해 9월 조선유교회 명리원 법정, 12월 대일본쇼와연맹 경성지부 지부장을 맡음. 1933년 3월 조선신궁 설립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조선신궁봉찬회를 발기하고 10월 고문에 위촉.
- 1934년 11월 “일본 민족과 혼연일체가 되어 우리의 자립적 실력을 확충하자”면서 조직된 시중회(時中會)에 평의원으로 참여.
- 1935년 10월 시정25주년기념표창을 받음.
- 1937년 4월 만주사변 때 후방지원에 힘쓴 공로로 일본 육군대신이 주는 표창을 받음. 같은 해 8월 중일전쟁 개전 이후 조선인의 전쟁협력을 고무하고자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조직한 전조선순회시국강연단에 연사로 참여하여 전라북도와 전라남도 일대에서 강연. 9월 제2차 전조선순회시국강연단에 참여하여 강원도 일대에서 강연.
- 1938년 7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설립될 때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1939년 4월 평의원을 맡음.
- 1939년 4월 경성과 함경북도 나남 두 곳에 호국신사를 건립하자는 호국신사봉찬회에 발기인으로 참여. 같은 해 11월 조선 유림의 전쟁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조직된 조선유도연합회(朝鮮儒道聯合會)의 평의원으로 활동.
- 1941년 5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확대 개편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평의원을 맡음. 같은 해 6월 중추원 부여신궁공사 근로봉사에, 9월 조선임전보국단이 조직될 때 경성지역 발기인으로 참여.
- 1943년 8월 조선인 유지들과 함께 징병령실시감사회를 조직하고 구체적 실행방안을 논의하는 데 참가. 같은 해 11월 중추원의 임시특별지원병제도 선전을 위한 연사로 함경북도에 파견.
- 1944년 7월 조선농회 통상의원, 1945년 1월 처우감사총궐기전선(全鮮)대회 부회장을 맡았으며, 5월 이왕직(李王職)장관에 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