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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필순(全弼淳) = 평강미주(平康米洲)

출생일: 1897.04.07 사망일: 1977.02.14 행위분야: 군인 인물경력 - 1912년 사립 봉양학교를 졸업하고 1914년 세례를 받음. - 1916년 아현보통학교 학감을 맡음. - 1917년 경성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소년부 간사에 임명. - 1919년 1월 원세성(元世性)의 추천으로 연동교회 조사(助事)를 맡음. - 1919년 민족대표 33인 석방 서명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며 독립운동을 한 혐의로 11월에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 1921년 5월 석방된 후 일본에 건너가 고베(神戶)신학교에 입학해 1926년 졸업. - 1926년 4월부터 서울 연동교회 조사로 있으면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1개월동안 공부하고 1927년 6월 경기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음. 이후 묘동교회를 담임하고 피어선성경학원 강사로 출강. - 1927년 일본에서 종교단체법안이 일본 제국의회에 제출되자 장로회 대표로 일본을 방문해 법안 제정 반대운동을 전개. - 1928년 조선기독교서회 이사와 연희전문학교 이사를 맡음. - 1931년 묘동교회를 사임하고 기독신보 기자를 거쳐 사장에 취임. - 1933년 YMCA 이사, 피어선고등성경학원 이사장 겸 원장을, 1935년 수송교회를 담임하고 태화여자관 이사도 겸임. 1937년 기독신보사 이사를 맡음. - 1941년 4월 연동교회를 담임. 같은 해 11월과 1942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경성노회장으로서 조선예수교장로회 부총회장에 선임. 친일행적 - 1937년 7월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이를 지지 찬양하는 「태양은 창공에 놉히 떳다」라는 제목의 글을 매일신보 7월 25일자 호외에 실었고, 그달 26일 종로 청년회관에서 개최된 각 종교단체 연합 시국대강연회에서 같은 제목으로 감리회 양주삼목사와 함께 기독교계를 대표하여 강연. - 1938년 8월 윤치호•김우현 등과 함께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주최한 ‘기독교 애국좌담회’에 참석. - 1939년 9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 평의원에 선임되었고, 같은 해 12월 남대문교회에서 경성노회지맹을 결성할 때 노회장으로서 이사장직을 맡음. - 일본 녹기연맹에서 발행하는 녹기(綠旗) 1939년 11월호에 일본의 진정한 적은 어디에 있는가 ― 그 이유(日本の眞の敵は何處か ― その理由)라는 특집란에 일본이 막대한 물자와 고귀한 피를 흘리는 이유는 “팔굉일우(八紘一宇)의 대성업(大聖業)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므로, 이 대업을 이루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은 모두가 적이라고 주장. - 1941년 12월 ‘미영타도좌담회(米英打倒座談會)’에 참석. - 1942년 지방 시국강연회 연사로 활동했고, 같은 해 2월 갈홍기•심명섭 등과 함께 국민문학에서 주관하는 ‘반도 기독교의 개혁을 말한다’(半島基督敎の改革を語)는 좌담회에 참석. 같은 해 4월 조선기독교연합회 부위원장을 맡음. 9월 국민총력조선연맹에서 일본기독교단 통리 도미타(富田滿)의 내방을 계기로 ‘기독교의 일본화의 급무’라는 주제로 조선호텔에서 열린 좌담회에 참석. 같은 달 ‘장로회 헌납 해군기 명명식’에 동참. 같은 해 11월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연맹 주최로 조선신궁에서 개최된‘황군 환자용 자동차 3대 헌납식’에 정인과(鄭仁果)•김응순(金應珣) 등과 함께 참여. 같은 달 안국동교회에서 경성노회와 경기노회가 합동해 경기노회를 조직하고 노회장에 선임되었으며, 국민총력 경기노회연맹 이사장을 맡음. - 1943년 1월부터 교파합동회의를 거듭하다가 감리교회와 장로회 경기노회가 주동해 이해 4월 일본기독교 조선혁신교단을 창설할 때 통리를 맡음. 그러나 장로회 측의 반대로 1개월 만에 교단이 해체되었고, 같은 해 5월 장로교는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으로 개편. - 1944년 12월 다시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부통리를 맡음. - 1945년 3월 조선총독부 사회과장실에서 종교보국회 정례이사회를 열어 종교단체 원호운동을 협의할 때 장로교단 부통리로서 참석해 군사원호사상 강습회 개최, 군인원호상담소 설치, 유가족 위안회 개최 등을 결의. 같은 해 6월 조선총독부에서 주최한 교역자 간담회에 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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