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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광렬(柳光烈)

출생일: 1899.06.27 사망일: 1981.11.03 행위분야: 기타 인물경력 - 1914년 보성법률상업학교에 입학했으나 두 달 만에 중퇴. 이후 경기도 고양군 중면 서기로 근무. - 1917년 방정환(方定煥)과 함께 청년구락부를 조직하고 신청년을 발행. - 1919년 8월 매일신보사에 입사하여 기자생활을 시작. 같은 해 9월에 선우일(鮮于一)이 만주 펑톈(奉天)에서 발행하던 만주일보의 경성지국으로 옮김. - 1920년 2월 동아일보가 창간되면서 사원으로 입사해 사회부 기자로 근무. 1923년 5월 동아일보 상하이특파원을 지냈고, 1924년 5월 동아일보 분규 때 사직. - 1924년 10월 혁신된 조선일보로 옮겨 사회부장을 맡음. 1925년 10월 조선일보 필화사건으로 조선총독부의 압력을 받고 해직. 같은 달 조선농민사(朝鮮農民社) 이사로 활동. - 1926년 봄 시대일보 사회부장으로, 같은 해 11월 중외일보가 창간되자 편집국 차장으로 활동. 1927년 5월 조선일보 사회부장으로 복귀. - 1928년 5월 조선농민사 교육부장으로 활동. 1929년 11월부터 1931년 10월까지 조선일보 편집인을 맡음. 1930년 5월 조선물산장려회 이사로 활동. - 1931년 1월 조선농민사에서 분리된 전(全)조선농민조합 고문에 추대. 같은 해 11월부터 1932년 4월까지 중앙일보 지방부장을 지냄. 1932년 8월 조선문필가협회를 발기하고 서무부원으로 활동. - 1933년 9월 발명학회 이사로, 1934년 4월 조선물산장려회 이사로 활동. 친일행적 - 1933년 매일신보사에서 편집국장 대리 겸 지방통신부장을 지냄. - 1937년 9월 매일신보 특파원으로 선발되어 북중국의 전선을 시찰하고 10월 21일부터 11월 3일까지 매일신보에 총 12회에 걸쳐 「북지전선(北支戰線)에 다녀와서」를 연재. 1938년 5월 매일신보 논설부장을 맡음. - 1940년 2월 매일신보 편집국장에 올랐지만 4월에 사직. 1941년 8월 임전대책협의회(이후 임전대책협력회로 개칭) 결성식에 참석했고, 9월 임전대책협력회와 흥아보국단을 해체•통합해 새로이 전쟁협력을 위한 전시 최대 민간단체로 조선임전보국단이 결성될 때 발기인으로 참여해 10월 평의원을 맡음. 1944년 9월 국민동원총진회 상무이사를, 1945년 6월 조선언론보국회 이사를 맡음. - 기자와 문필가로 활동하면서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찬양하고 선전하는 수많은 글을 발표. 춘추 1942년 2월호에 발표한 「대전 후의 세계관」에서 일본의 미국 침공을 “도의 세계의 건설, 국제정의 실현, 동아의 해방과 자유라 찬미하고 필승을 축원. 또 조광 1942년 3월호 「대동아선언의 의의」에서는 하와이의 진주만 기습을 “동아를 해방케 하는 대동아전쟁”이라고 규정. 조광 1943년 9월호 「대동아전쟁의 성전 의의」에서도 최후의 승리를 위해서 전쟁의 특질을 파악해야 한다면서 “첫째,이 전쟁은 생존을 위한 전쟁이다. 둘째, 이 전쟁은 대동아 방위의 전쟁이다. 셋째, 이 전쟁은 해방을 위한 전쟁”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조선인들이 군수물자 동원이나 징병•지원병, 노무동원을 통해 협력해야 한다고 선동. - 조광 1942년 6월호 「징병제 실시와 조선인의 각오」에서 “(징병제 실시) 발표를 보자 반도 민중은 한결같이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성은하에 국방의 중임을 분하(分荷)하게 된 광영에 감격하고 역대의 통치 당국과 군 당국이 반도 동포를 잘 지도•계발시키어 금일의 광영에 균점케 된 데 대하여 감사하게 되었다.”라며 징병제 실시를 환영. 조광 1943년 6월호 「해군지원병제 실시와 반도 청년의 영예」에서도 “명년의 징병제를 앞두고 또다시 해군지원병제의 실시를 보게 된 것은 반도 동포의 광영으로 일시동인의 성지에 감격하여 오직 봉답에 지성을 다할 바”라면서 감격했고, 이어 “생을 이 세기적 결전시대에 타고나서 동아인의 천년 운명을 결정하는 태평양전에 나선다는 것은 남아의 본회(本懷)라 할 것이다.”라며 지원병 지원을 선동.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인 1944년 조광 1월호 「대동아전쟁 3년 ‒‒ 결전의 해인 동시에 결승의 해이다」에서는 “일억 국민은 진실로 금년이 결전의 해라는 각오하에 더욱 분투”해야 함을 역설한 뒤, 1944년을 “결전의 해인 동시에 승리의 해”로 만들기 위해 “오직 생산력 증강, 특히 적이 과시하는 공군에 대응할 비행기 기타 군수의 증산을 도모하기 위하여 총후 국민의 총력을 다할 것”을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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