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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섭(金鍾燮) = 금삼신(金森信)

출생일: 1898 사망일: 미상 행위분야: 법조인 인물경력 - 일본 메이지(明治)대학을 졸업. 졸업 후 경기도 인천지역을 중심으로 해륙(海陸)운송업에 종사. - 1926년 8월 강화와 인천 간을 주로 운행하는 기선과 화물 운송업체인 삼신기선(森信汽船)합명회사의 노무지배인으로 활동. 1927년 4월 삼신기선합명회사가 삼신기선주식회사로 전환할 때 취체역이 되었고, 1931년부터 1937년까지 전무취체역을 지냄. - 1929년 9월 인천상업회의소 평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30년 11월 상무위원을 맡음. - 1931년 4월 인천공직자연합회 위원을, 7월 경기 인천부세진흥회(仁川府勢振興會) 이사를 맡음. 1932년 3월 경성의 용강기선(龍江汽船)주식회사 취체역 사장에 취임. 이해 9월과 1938년 9월 인천상공회의소 의원에 선출. 1934년 9월 경성세무감독국 인천세무서 소득조사위원에 선임. 1935년 9월 인천상공회의소 부회두에, 1937년 1월 인천상공협회 부회장에 선임. - 1938년 9월 인천부세진흥회 간사로 활동. 1939년 삼신기선주식회사가 삼신운수주식회사로 전환될 때 전무이사를 맡았다가 1941년 대표에 취임. 1939년 10월 인천연료(仁川燃料)주식회사의 취체역을 맡음. 1940년 3월 인천해운조합 기선부(汽船部) 회장, 4월 인천합동운송주식회사 취체역, 7월 인천부세진흥회 이사, 8월 조선해상방공연맹 경기도지부 이사를 지냄. 1941년 2월 전시 해운업 통제를 위해 설립된 인천해운조합 이사를 맡았고, 3월 인천운송주식회사 취체역에 취임. - 1943년 인천범선해운조합(仁川帆船海運組合) 이사를 지냈으며, 그해 3월 인천항운주식회사가 설립되자 취체역을 맡았고, 1944년 5월 재단법인 인천실업학원이 설립되자 이사를 맡음. 친일행적 - 1931년 5월 인천부 부회의원에 당선한 뒤 1935년 5월, 1939년 5월, 1943년 5월에도 연속으로 당선해 해방될 때까지 15년간 인천에서 부회의원으로 활동. - 1938년 1월 23일자 매일신보에 게재된 ‘지원병제, 학제 개혁 ‒‒ 현실에 각지 관민(官民) 만뢰(萬雷)의 격찬’ 이란 특집에 「실로 감개무비(感慨無比)」라는 제목의 지원병제실시 감사담화에서, “금춘 조선인 지원병 제도의 실시를 보게 됨은 불원(不遠)한 장래의 징병제도 실시의 전제다. …… 아(我) 조선은 명치43년(1910)에 이르러 동양평화를 확립함에는 내선(內鮮) 양 민족의 일치단결적 결합에 있음을 자각한 동시에 위정자는 일한합병의 홍업(弘業)을 완성하여 아(我) 조선인도 일본 국민으로 당당한 권리의 향유 및 의무의 부담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대의 민도(民度) 관계, 즉 교육과 부담력의 균형상 국민의 3대 의무인 병역 및 의무교육제도를 실시치 못한 바, …… 금번 남(南) 총독 취임 이래 선만일여(鮮滿一如), 내선일체 등을 주창하여 신흥 조선의 전모를 중외에 선포하여 …… 더욱 조선인의 애국적 억심(億心)을 간취(看取)하고 징병제도 및 의무교육 실시의 본업(本業)을 완성할 준비기에 지(至)하였음은 아(我) 조선인으로서 실로 감개무비(感慨無比)한 바이다. 따라서 이 제도를 실시 후 물론 호성적(好成績)을 기할 바는 무의(無疑)나 아등(我等) 사회인으로서는 만강(滿腔)의 성의(誠意)로써 성원할 책무가 있다고 생각한다.”라면서, 일본의 침략전쟁 수행에 조선인이 적극 협력하자고 주장. - 1941년 4월 강화지역 지원병후원회, 국민총력 강화군연맹, 강화군 군사후원연맹 등에 2500여 원을 헌납했고, 같은 달 인천금융조합 평의원을 지냄. 같은 해 6월 강화항운조합(江華航運組合) 조합장과 국민총력 인천부연맹 이사를 맡음. - 1942년 7월 경성보호관찰소 촉탁보호사에 임명. 촉탁보호사의 임무는 사상범이 출옥 후 다시 항일운동을 하지 못하도록 “사상적 과오를 청산하고 황도정신(皇道精神)을 자각하여 충량(忠良)한 황국신민이라는 본연의 자세로 복귀”하도록 전향시키는 것임. - 1943년 11월 임시특별지원병 인천부익찬회 부회장에 선임되어 학도병 출진과 일제의 징용•징병을 선전하고 격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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