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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린회기념비 = 善隣會紀念碑

비문내용 (전면) 善隣會紀念碑 (우측면) 爲老幼疾病不具灾害者之救濟而有善鄰會其救濟資金設立者及其子侄并六人出三萬四千五十八元贊助/ 員三十八人一千一百二十七元殖産株式會社百八十一人一千九百円玄方保農社十七人三百十八元總金/ 三萬七千四百三元人二百四十二而金增一千元者五年受賞賜也其救濟區驪州十之全利川十一之四廣州/ 十六之一其被救濟者自始至癸酉六百九十人其勞務者會長一人副會長二人會計一人書記一人其勞務少/ 者理事之不爲長副長者二人監事三人評議員十人顧問二人委員十五人共三十七人并出金者二百四十二/ 人總二百七十九人而多架疊其辦事處利川之玄方市殖産會社構內也其方法一以買田一以買會社資券計/ (후면) 入而出出之使里長知救之使里人觀感其施設自甲子至癸酉十年紀念者自上年鄕人士齊力開小園名善隣/ 會紀念公園園中作小亭名白鶴亭以白鶴栖庭樹也亭前立石碑前刻善隣會紀念碑六字其經歷李公敏應以/ 庚申秋移居驪州之絲田則與玄方市接沈君圭澤素善李公亦以是歲移居玄方市沈君說李公低利殖金李公/ 殖金而鄕村利率低沈君又說李公救民術李公難之沈君語之曰公常言爲富不可者今殖金不救民殆於不可/ 乎李公諾之沈君勞其務世淳亦與焉始盖試之也甲子春廣其事設立者李公呈官官許之丁卯夏又廣之爲今/ 日也意出金者樂勞務者無酬金存餘圖增區廣濟盖二百七十九人之設與助與勞皆可紀而終始長於會不倦/ 者沈君也沈君欲立碑記事李公止之壬申春李公絜家入滿洲而碑立矣世淳以記碑陰者朮朝鮮著名人不得/ 求中國人亦不能乃以自爲文者書于李公朮筆削李公削而少之世淳不敢不從然窃欲益之以數語曰著五倫/ ​原理者設之爲呂氏鄕約者助之專理殖産會社者勞之是可謂集衆美而世淳欲以讀霍光傳者記之可愧也己/ ​乃係詩曰/ 元積山積元篤生一異人觀厥初喤喤氤氳一團春孩笑己溫良走作更厚醕三歲成人格一身都是仁統系出財/ 團表德曰善鄰仁德覆下土厥祖應蒼旻東遍黃驪水童叟稱瑞獜五過鼎盖山人不憂採薪春和起徘徊誰有無/ (좌측면) 告民家從二百餘猶復誥諄謞仁惟你性命法乃你護身與法俱進千歲若一晨法人壽千歲萬口成一珉/ ○○○(昭和八)年癸酉三月 日/ 任世淳 撰/ 宋光烈 書/ 前面 張遇聖 書/ 풀이 (전면) 선린회기념비 (우측) 노인과 어린아이가 질병이 들거나 재해를 입어 온전하지 못한 자를 구제함에는 선린회(善鄰會)가 있다. 그 구제자금을 설립한 자 및 그 자질(子姪)들 6인이 함께 34,058원을 모으고, 찬조원 38인이 1,127원, 식산주식회사 181인이 1,900엔, 현방보 농사(玄方保農社) 17인이 318원, 총금 37,430원 242인이 찬조하여 금액이 1,000원 으로 늘린 것은 5년간 그 혜택을 입을 것이다. 그 구제한 구역(區域)은 여주 10구역 전체, 이천의 11구역 가운데 4, 광주 16 가운데 1구역이며, 그 구제를 입은 자는 처 음부터 계유년(1933)에 이르기까지 690인이며, 그 담당자[勞務者]는 회장 1인, 부 회장 2인, 회계 1인, 서기 1인이며, 노무가 적은 자는 이사로서 회장이나 부회장이 아닌 장자(長者) 2인, 감사 3인, 의원(議員) 10인, 고문 2인, 위원 15인으로 모두 37 인이며 아울러 출금(出金)한 자는 242인, 총 279인이다. 많은 가구를 늘어놓은 사 무하는 곳은 이천의 현방시(玄方市)식산회사 건물 내이다. 그 방법의 하나는 토지 를 사거나 회사증권을 사서 (후면) 이장으로 하여금 수입을 계산하고 출금하도록 하고,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구제 한 것을 알게 하여 그 시설한 것을 보고 느끼도록 하였다. 갑자년(1924)부터 계유년 (1933)까지 10년(의 활동)을 기념(紀念)한 것은 나이 많은 지방의 인사들이 힘을 모 아 작은 정원(小園)을 만들어 이름을 선린회(善隣會) 기념공원이라 하고, 그 가운데 작은 정자를 지어 이름을 백학정(白鶴亭)이라 하였는데 백학(白鶴)이 정원의 나무 에 살기 때문이다. 정자 앞에는 석비(石碑)를 세워 앞면에는 ‘선린회기념비(善隣會 紀念碑)’라 여섯 자를 새겨 이민응(李敏應) 공이 경신년(1920) 가을 여주의 사전(絲田)으로 이주하여 현방장터에서 만난 심규택 군이 평소 선행함과 더불어 이(李) 공 또한 이 해에 현방시장으로 이거하여 심 군이 이 공에게 저리(低利)로 식금(殖金) 함을 얘기하였는데, 이 공의 식금(殖金)이 향촌의 이율보다 낮았다. 심 군이 또 이 공에게 구민술(救民術)을 말하니 이 공이 어려운 일이라 하였다. 심 군이 말하기 를, “그대가 늘 하는 말로는 부자가 될 수 없지만, 지금 식금(殖金)하여 민을 구제 하지 않으면 거의 안되지 않는가?” 하자 이에 이 공이 수락하였다. 심 군이 그 사 무를 애쓰고 (임)세순 또한 함께 하여 비로소 시도되었다. 갑자년(1924) 봄 널리 그 일을 설립한 것은 이 공이 관에 올리고 관의 허가를 받은 것은 정묘년(1927) 여름 이었으며, 또 이를 늘려서 비로소 오늘날에 이르렀다. 아! 출금(出金)하는 자와 노 H51 즐겨하는 자는 보수금 없이 구역(區域)을 널리 늘리자 모두 279인이 설립하여 함께 도와주거나 노무하니 모두 기강이 있었고 끝내 길게 모임에 나태하지 않은 것 은 심 군이다. 심군이 비석을 세워 기록하고자 하였으나 이 공이 그만두도록 하였 다. 임신년(1932) 봄 이 공이 온 가족을 데리고 만주(滿洲)로 들어가자 비석을 세웠 다. (임)세순이 비의 음기를 기록한 것은 조선에서 유명인도 구할 수 없었고, 나라 사람들도 또한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스스로 문장을 지어 이 공에게 편지를 보내 수정하기를 청하였는데 이 공이 수정한 것은 많지 않았으나, (임)세순이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몇 마디를 더 보태어 말하기를, “오륜(五倫)의 원리 를 드러낸 것은 여씨향약을 설립하는 것이요, (오륜을) 돕는 것은 식산회사를 전담 하는 것이요, (오륜을) 힘쓰는 것은 곧 온갖 아름다움을 모은 것이니 (임)세순이 (나 에게) 곽광전(霍光傳)을 읽히고자 한 것을 기록하니 가히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이 시를 지어 붙였다. 元積山積元 篤生一異人 원적산은 근원을 쌓아 이인(異人) 한 사람을 세상에 내셨 으니 五過鼎盖山 人不憂採薪 다섯 번 정개산 찾아가도 땔나무 걱정하는 이 없네. 春和起徘徊 誰有無 따듯한 봄기운 돌면 누가 알지 못하는 이 있으리 (좌측) 告民 家從二百餘 猶復誥諄諄 그대 따르는 이백 여 명, 다시 간곡히 타이르니 仁惟你性命 法乃你護身 인(仁)은 너의 성명(性命)이요, 법은 너의 호신(護身)이라. 你與法俱進 千歲若一晨 너와 법이 함께 나아가면 천 년 또한 하루아침 같고 法人壽千歲 萬口成一珉/ 법인(法人)은 천 년 갈 것이요, 모든 민은 하나의 옥돌과 같으리. 쇼와8년(1933) 계유년 3월 일, 임세순 짓고, 송광렬 쓰고, 앞면은 장우성이 씀 觀厥初喤喤 氤氳一團春 그 처음의 우렁한 울음을 보면 한 덩어리 봄기운 같네. 孩笑己溫良 走作更厚醕 온화하고 순량함은 어린아이 웃는 듯하다 다른 데로 달아 나도 다시 후덕하고 순수하니 三歲成人格 一身都是仁 삼 년 만에 인격을 이루었고 한 몸은 모두 어질었네. 統系出財團 表德曰善鄰 계통을 이어 재단을 출연하여 ‘선린(善鄰)’이라 이름하니, 仁德覆下土 厥祖應蒼旻 인덕(仁德)이 아래 땅을 덮었고 그 조상은 하늘에 응했네. 東遍黃驪水 童叟穪瑞獜 동쪽으로는 황려강 흐르고 아이와 늙은이는 상서롭고 건장해 五過鼎盖山 人不憂採薪 다섯 번 정개산 찾아가도 땔나무 걱정하는 이 없네. 春和起徘徊 誰有無 따듯한 봄기운 돌면 누가 알지 못하는 이 있으리 (좌측) 告民 家從二百餘 猶復誥諄諄 그대 따르는 이백 여 명, 다시 간곡히 타이르니 仁惟你性命 法乃你護身 인(仁)은 너의 성명(性命)이요, 법은 너의 호신(護身)이라. 你與法俱進 千歲若一晨 너와 법이 함께 나아가면 천 년 또한 하루아침 같고 法人壽千歲 萬口成一珉/ 법인(法人)은 천 년 갈 것이요, 모든 민은 하나의 옥돌과 같으리. 쇼와8년(1933) 계유년 3월 일, 임세순 짓고, 송광렬 쓰고, 앞면은 장우성이 씀 설명 선린회는 저리대출을 통한 빈농(貧農) 구제사업을 목적으로 여주군 유지 이민응(李敏應 창씨명 春木千之, 1876~1955)과 군서기 출신 심규택(沈圭澤 창씨명 靑松圭澤, 생몰년 미상) 이 주도하 여 1924년 봄에 설립하였고, 1927년 6월 16일에 이르러 재단법인 설립허가를 받은 단체이다. 이 민응 일가의 만주 이주를 계기로 1933년 3월, 선린회의 설립경위와 운영결과 등 10년간의 경과 를 간추려 새겨 선린회기념공원의 백학정(白鶴亭) 앞에 세운 것이 이 비석이다. 비문의 내용은 선린회 이사인 임세순과 송광렬이 각각 짓고 썼으며, 전면에 새겨진 ‘선린회기념비’라는 제자(題 字)는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화가 장우성(張遇聖, 1912~2005)이 20세를 갓 넘긴 청년 시절 여주군 흥천면 외사리에 거주하고 있을 때 쓴 글씨이다. 재단법인 선린회는 해방된 뒤인 1947년 4월 16일에 해산하였다. 선린회의 창립을 주도한 이민응은 대한제국 시기에 중추원 부찬의(1907.3)와 학부 서기관 (1907.8)을 지냈고, 경술국치 직후에 경상남도 기장군수(1911.3.14~5.26)를 거쳐 양평군 서시면장 (西始面長, 1913.6.23 사임)을 지냈다. 그는 1921년에 여주로 주거를 이전한 이후 식산조합과 선 린회를 결성하여 이끈 공로로 1928년 7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이케가미 시로(池上四郎)가 수여 하는 은배(銀盃)를 수령하였다. 여주 흥천면 지역에도 별개의 ‘이민응 통정대부 송덕비(1925년 7 월 건립)’와 ‘이민응 학부참서 기념비(1936년 12월 건립)’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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