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난종 일가 묘역은 조선 전기의 문신인 정난종과 그 후손의 무덤이다. 정난종 부부의 무덤은 하단에 위치하고, 장남인 정광보 부부의 무덤이 중단에 있으며, 차남인 정광필 부부의 무덤이 상단에 있다. 그 외에도 정광좌, 정위겸, 정익겸, 정복겸, 정유진, 정유청, 정준항, 정진원 등 여러 후손의 무덤이 남아 있다.
정난종鄭蘭宗(1433-1489)은 세조와 성종 연간에 활동한 인물로 성리학에 뛰어난 당대 최고의 서예가이다. 그는 당대 최고의 서예가로 초서草書, 예서隸書, 조맹부체趙孟頫體를 잘 썼다.
정난종의 장남 정광보鄭光輔(1457~1524)는 군수와 부사로 여러 고을의 장을 역임하였다.
그의 차남인 정광필鄭光弼(1462~1538)은 중종 연간에 활약한 인물로 1519년 기묘사화 때 조광조를 구하려다 좌천된 후 중종반정 이후에 영의정까지 올랐다. 왕의 신주를 모시는 종묘에는 왕을 보좌한 대표적인 공신을 함께 배향하는데, 정광필은 중종의 공신으로 이름을 올렸다.
정난종, 정광보와 정광필은 조선 전기의 문인이자 대표적인 재상宰相 일가로 무덤의 인물을 알려주는 신도비神道碑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세 인물의 신도비는 무덤 서쪽에 위치한다.
1525년에 설치된 정난종의 신도비는 상단에 용무늬[螭首]가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정난종 신도비는 남곤南袞이 글을 짓고, 강징姜澂이 글씨를 썼다. 같은 해 조성된 정광보의 신도비는 이수와 귀부가 있는 화려한 비석으로 정광보의 둘째 아들인 정사룡의 부탁으로 이행李荇이 글을 쓰고, 성세창成世昌이 글을 썼다. 1562년에 설치된 정광필의 신도비는 소세양蘇世讓이 글을 짓고, 이황李滉이 비문의 글씨를 써 그 위상을 드러낸다. 이처럼 정난종, 정광보, 정광필의 신도비는 조선 전기의 손꼽히는 문인들이 글을 짓거나 썼다.
각 인물의 묘역에는 무덤의 인물을 알려주는 묘표墓表가 설치되어 있고, 중앙에는 상석床石과 향로석香爐石, 장명등長明燈이 설치되어 있다. 묘역의 양 옆으로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文人石을 두기도 하였다.
정난종 무덤에는 두 쌍의 문인석이 설치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큰 문인석은 폐비윤씨 회묘[제헌왕후 회릉]의 문인석과 유사하여 능 석물에 비견되는 규모와 형태를 보인다.
정광보 무덤의 문인석은 금관[양관]을 쓰고 조복을 착용한 복식을 착용하였는데, 금관조복형 문인석이 16세기 중반 이후에 유행한 것을 감안하면 이른 시기에 나타난 석인의 복장이다. 정광보 묘 문인석은 뒷면에 화려한 후수와 패옥을 섬세하게 표현하여 조각 기법이 우수하다. 정광보 부부의 봉분 사이에 하나의 묘표가 있는데, 상단에 해치로 보이는 동물상이 조각되어 있다. 해치는 종2품 대사헌의 흉배 문양에 등장하기 때문에 정3품인 정광보의 품계에는 걸맞지 않는다. 그러나 자손들의 예우에 따라 정광보 묘의 신도비, 묘표와 문인석 등 석물이 모두 한 단계 높게 적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정광필의 문인석은 생동감 있는 얼굴의 개성이 드러나는 표현력이 돋보인다.
정난종 일가 묘역은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사대부의 무덤으로 15~16세기의 사대부 묘제를 파악할 수 있으며, 당대의 손꼽히는 문인의 글과 글씨를 찾을 수 있는 주요한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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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비 750
- 높이 6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