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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파(洪蘭坡) = 삼천윤(森川潤)

출생일: 1898.03.19 사망일: 1941.08.30 행위분야: 예술인 인물경력 - 1910년 9월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청년학관 중학과에 입학 1914년 3월 졸업. - 1912년 4월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 서양악부(西洋樂部) 성악과에 들어가 음악공부에 전념해 1913년 4월 제2회로 졸업. 같은 해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부 기악과에 입학해 바이올린 연주가로 활동하면서 1914년 3월 졸업. 다음 해 1월 서양악부 교사로 임용. - 1918년 4월 관립 도쿄(東京)음악학교[일명 우에노(上野) 음악학교 : 현재 도쿄예술대학 음악학부] 예과에 입학해 1919년 3월 수료. 같은 해 2월 일본에서 음악•미술•문학 분야를 다루는 잡지 삼광을 창간하고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활동. - 1922년 9월 전문적인 음악연구기관인 연악회(硏樂會)를 창설 운영. - 1926년 3월 도쿄고등음악학원[현재 구니다치(國立)음악대학] 선과(選科)에 바이올린 전공으로 입학해 본과로 진학한 후 1929년 3월에 졸업. - 귀국 후, 1929년 9월 중앙보육학교 음악 교유(敎諭)에 취임. 1931년 9월 미국 시카고 셔우드(Sherwood)음악학교 연구과에 입학해 1932년 6월 음악학사 취득. 셔우드음악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1년 12월 미주 흥사단(興士團)에 가입. - 1933년 4월 경성보육학교 음악 주임교유에 취임. 1934년 6월 일본 빅타(Victor)축 음기주식회사 경성지점 음악주임에 취임. - 1935년 9월부터 1936년 3월까지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 강사를 지냄. 1928년에 도쿄신교향악단(東京新交響樂團 : 현재 NHK교향악단)에 입단해 제1바이올린 연주자로 활동했고, 1937년 11월에는 경성중앙방송국 방송관현악단 지휘자로 취임. - 작품으로는 「봉선화」[기악곡 「애수」(1920.4)에 후일 김형준이 가사를 붙여 ‘鳳仙花’로 불려졌다] 등의 가곡, 「고향의 봄」(이원수 작사, 1929.10) 등의 동요, 「애수의 조선」(1927.8) 등의 기악곡 등 150곡이 넘는 곡을 작곡. 조선동요백곡집(1929.10, 1930.4, 1933.5) 등의 작곡집을 발간하는 한편 악전대요(樂典大要)(1916.4) 등의 음악 관계 서적의 저술과 편저 활동. 많은 장편•단편소설도 집필해 처녀혼(處女魂) (1921.5) 등 창작집을 발간. 청춘의 사랑[도스토예프스키 원작의 가난한 사람들(Poor Folk), 1923.6]•나나(에밀 졸라 원작, 1924.6) 등도 번역 출간. 저서와 번역서는 20여 종이 있고, 이외 신문•잡지에 많은 글과 평론을 발표. 친일행적 - 미국 유학 중 흥사단에 가입한 일로 1937년 6월 ‘동우회사건(同友會事件)’으로 검거되었고, 이 시기를 전후해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하는 내용의 가요를 작곡하는 한편 단체에 가입해 활동. 같은 해 7월 빅타축음기주식회사 경성지점 음악주임을 사임했고, 8월 경성보육학교 음악 주임교유를 사임. 같은 해 8월 21일 ‘석방 또는 송치’되었다가 10월에 기소유예 처분을 받음. 같은 해 11월 「사상전향에 관한 논문」(思想轉向に關いての論文)을 제출. 자필로 쓴 「사상전향에 관한 논문」에서 “민족운동을 표방하는 단체에 가맹한 적이 있는 필자는, 그 동기 여하와 그 활동 유무를 막론하고 후회가 막급할 뿐 아니라, 민중의 지도자의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서 차제에 부끄러움을 금할 수가 없다. 따라서 사상전향을 결의하고 나의 그릇된 생각과 마음가짐을 바꿔 과거를 청산하고, 금후는 일본제국의 신민으로서 본분을 다하고, 온건한 사상과 정당한 시대관찰로써 국가에 대해 충성을 꾀하며, 민중에 대해서는 훌륭한 지도자가 될 것을 맹세하는 바이다.”라고 기술. - 1938년 6월 동우회사건 관련자들과 함께 대동민우회(大東民友會)에 가입하면서 조선 민중의 행복은 내선(內鮮) 두 민족을 하나로 하는 대일본 신민이 되어 신동아건설에 매진함에 있다는 취지의 ‘전향성명’을 발표. 대동민우회는 민족주의•사회주의 두진영의 사상 전향자들을 회원으로 한 단체로 반(反)공산주의 운동을 전면에 내걸고 일본의 대국가주의(大國家主義) 사상을 추종. - 1937년 5월 창립된 친일문예단체 조선문예회(朝鮮文藝會)에 김억(金億)•이광수(李光洙)•최남선(崔南善) 등의 문인, 이종태(李鍾泰)•박경호(朴慶浩)•함화진(咸和鎭)•현제명(玄濟明) 등의 음악인과 함께 위원으로 참여해 활동. 조선문예회는 조선의 가요를 정화해 일본의 국체(國體)와 전시체제의 선전물로 전환하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외곽단체로 조직한 단체. 같은 해 9월 매일신보사가 주최하고 조선문예회가 후원해 일본군의 중국 바오딩(保定) 점령을 축하하고 ‘황군(皇軍)’에 감사하자는 목적으로 경성 부민관에서 열린 ‘바오딩함락 축하 황군감사 대음악회’에서 자신의 작품인 「정의의 개가」(正義の凱歌 : 최남선 작시)와 「공군의 노래」[空軍の歌 : 스기모토 나카오(杉本長夫)작시]를 작곡해 발표하는 한편 제2부에서는 오케스트라를 지휘. 이날 공연 수익금은 황군위문을 위해 사용하기로 결정. 같은 해 10월에는 경성고등음악학원이 주최하고 경성군사후원연맹과 경기도군사후원연맹의 후원으로 열린 음악보국대연주회(音樂報國大演奏會)에 출연해 바이올린을 연주. 이 연주회 출연자들도 수익금 모두를 국방헌금으로 헌납할 것을 결의. - 1938년에는 천황의 분부를 받들어 팔굉일우(八紘一宇)로 대아세아의 대공영권을 건설하여 일장기 날리면서 자자손손 만대의 복 누릴 국토를 만들자는 「희망의 아침」(이광수 작사)을 작곡해 가정가요 제1집에 발표. 이 노래는 1941년 1월 7일부터 25일까지 가창지도곡으로 선정되어 여러 차례 라디오로 방송. 1939년 10월에는 라디오로 방송된 ‘애국가곡집’ 프로그램에서 경성방송관현악단이 연주한 「대륙행진곡」•「황국정신으로 돌아가」(皇國精神にかへて)•「애마 진군가」•「부인종군의 노래」(婦人從軍の歌)•「태평양행진곡」 등을 지휘. - 같은 해 11월에 방송된 「우미유카바」(海行かば : 바다로 가면)•「기념식행진곡」•「애국행진곡」 등과, 12월에 방송된 「태평양행진곡」 등을 연주한 중앙방송관현악단을 지휘. 1940년 11월 ‘기원2600년 봉축기념 현상 당선곡’인 「순정의 꽃장사」를 작곡. 1941년 2월 경성방송관현악단을 지휘해 「국민총력의 노래」•「모두 병사다, 탄환이다」 (みんな兵士だ彈丸だ)•「새벽에 빈다」(曉に祈る)•「출정병사를 보내는 노래」(出征兵士を送る歌)•「열사의 맹서」(熱砂の誓) 등을 방송. - 1942년 11월 열린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상위원회에서 홍난파 작곡의 「산에 들에」 (山に野に : 김안서 작사)가 「어머니의 마음」(母の心 : 양주동 작사, 이흥렬 작곡)과 함께 가정가요 부문 문화상 추천 작품으로 선정. 문화상위원회는 흙에서 일하는 기쁨을 노래하고 작곡 역시 경쾌하다고 선정 이유를 밝힘. 「산에 들에」도 「희망의 아침」과 함께 가정가요 제1집에 수록. - 1940년 7월 7일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사변 3주년과 반도문화의 여명 : 지나사변(支那事變)과 음악」에서 “과거에 있어서 국민가(國民歌)다운 국민가를 가지지 못했던 우리로서는 애국행진곡 같은 신(新)국민가를 가지게 된 것만으로도 이번 사변이 일억 국민에게 보내준 선물로 우리는 영원토록 언제나 이 노래를 고창함으로써 새로운 감격과 불타는 애국열을 고조시킬 것이 아닌가. 때는 바야흐로 기원 2600년! 성전도 이제는 제3계단에 들어가서 신동아건설의 대업이 하루하루 더욱 견실하게 실현되어가는 이때에 총후(銃後)에 있는 여러 음악가와 종군(從軍)했던 악인(樂人)들의 원정(援程)에는 의당히 넘쳐흐르는 감격과 예술적 감흥이 성숙해 갈 것인즉, 이번의 성업(聖業)이 성취되어 국위를 천하에 선양할 때에 그 서곡으로 그 전주적(前奏的) 교향악으로 음악 일본의 존재를 뚜렷이 나타낼 날이 1일이라도 속히 오기를 충심(衷心)으로 비는 바이며 우리는 우리의 모든 힘과 기량(技倆)을 기울여서 총후국민으로서 음악보국운동에 용왕매진(勇往邁進)할 것을 자기(自期)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라고 주장. - 1941년 1월 조선음악협회 결성대회에서 평의원에 선출. 조선음악협회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알선으로 학무국 내에 사무실을 두고 ‘음악의 건전한 발달과 음악가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여 신체제 문화의 발달 향상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모든 음악계를 포괄하는 최대의 단일 조직. 조선음악협회는 음악보국주간연주회 등의 연주회를 주최하고 후원하면서 음악이라는 직능으로 체제에 부응하고 침략전쟁에 협력하는 활동을 주도. - 같은 달 29일에 열린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회의에서 음악인으로 이철(李哲)•박경호(朴慶浩) 등과 함께 문화위원에 선임되어 활동.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는 ‘문화활동에도 신체제를 갖추고 활동 분야에 따라 민중을 지도하고자’ 설치되어 「국민총력의 노래」•「애국반의 노래」 등의 제정 보급, 전쟁 시국에 부합하는 국민가집의 발간과 보급, 싱가포르 함락을 축하하는 행진가인 「이겼다 일본」의 작곡과 보급, 국민개창운동 등의 활동을 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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