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김일해(金一海) = 금용정석(金用正錫)

출생일: 1906.12.20 사망일: 2004.07.11 행위분야: 예술인 인물경력 - 18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京都)중학을 다님. - 1926년 자전거포 점원으로 일하던 중 김성춘(金聖春)과 박누월(朴淚月)의 주선으로 데이고쿠(帝國)키네마 연기부에 입사. 데이고쿠키네마와 교토(京都) 신코(新興)키네마등에서 20편에 가까운 영화에 출연. - 첫 부인과 사별한 후 일본생활을 정리하고 1932년 귀국. - 1935년 김성춘이 세운 조선중앙키네마사 제작, 방한준(方漢駿) 연출 「살수차(撒水車)」로 조선영화계에 등장. 같은 해 박누월이 운영하던 영화시대사(映畵時代社) 제작, 박기채(朴基采) 연출 「춘풍(春風)」에 출연. 조선에서 첫 출연작인 「살수차」에서 특이한 분장으로 익살스러운 분위기의 우동집 노인을 연기. - 1937년 대구영화사(大邱映畵社) 제작, 신경균(申敬均) 연출 「순정해협(純情海峽)」과 경성촬영소(京城撮影所) 제작, 나운규(羅雲奎) 연출 「오몽녀(五夢女)」에 출연. - 1938년 반도영화사(半島映畵社) 제작, 방한준 연출 「한강(漢江)」과 천일영화사(天一映畵社) 제작, 윤봉춘(尹逢春) 연출 「도생록(圖生錄)」에 출연. - 1939년 조선영화주식회사 제작, 이규환(李圭煥) 연출 「새출발」, 고려영화협회(高麗映畵協會) 제작, 최인규(崔寅奎) 연출 「수업료(授業料)」에 출연. - 1930년대 말까지 개성적인 인물을 연기하며 조선영화계의 중견 연기자로 활약. 친일행적 - 일제의 영화통제가 강화되던 1930년대 말부터 전쟁지원을 위한 각종 정책에 적극 협조. 1939년 영화인 등록제가 실시되자 영화배우로 등록했고, 1941년 조선영화인협회 이사에 선임되었으며, 친일영화의 주요 배역으로 빠지지 않고 등장. - 출연한 영화로는 1941년 고아들을 돌봐 일본제국주의의 신민으로 만든다는 내용으로 고려영화협회 제작, 최인규 연출 「집 없는 천사」(家なき天使), 조선영화령의 실시에 맞춰 영화통제와 영화기업화를 찬양하는 내용으로 명보영화사(明寶映畵社) 제작, 이병일(李炳逸) 연출 「반도의 봄」(半島の春), 그리고 지원병제 실시를 찬양하는 내용을 담은 안석영(安夕影) 연출 「지원병(志願兵)」, 1942년 애견을 팔아 국방헌금을 내는 내용으로 조선영화사 제작, 김영화(金永華) 연출 「우르러라 창공」(仰げ大空) 등의 극영화와 1939년 “내선일체의 정신을 스스로 몸으로써 나타낸 고 이원하(李元夏) 옹의일생을 그린” 조선문화영화협회 제작의 「국기 아래서 나는 죽으리」(國旗の下に我死なん) 등의 문화영화에 출연. - 1942년 조선총독부의 통제영화사로 설립된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의 연기과 사원으로 입사한 후, 이곳에서 제작한 전쟁동원영화 「조선해협(朝鮮海峽)」, 「거경전(巨鯨傳)」, 「헤이따이상」(兵隊さん, 병정님), 「우리들의 전장」(我等の戰場)에 출연. - 친일영화에서 이성적인 사고와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인물로 주인공의 후원자 역을주로 연기. 「집 없는 천사」에서는 고아들을 돌보는 목사, 「반도의 봄」에서는 제작비가 없어 좌초하게 된 영화를 위해 노력하는 영화인, 「지원병」에서는 지원병으로 입대하기로 한 주인공의 가정을 돌봐 주기로 한 인물. 노골적인 선전영화인 「조선해협」에서는 지원병의 완고한 아버지, 「헤이따이상」에서는 전선으로 향하는 지원병의 든든한 큰형, 수산증산을 독려하는 「거경전」에서는 포경회사의 중역인 요도(淀島) 전무 역을맡음.
  • 파일명 210060412_IT0050117_20240418_DU_001.png
  • 파일 형식 png
  • 파일 크기 0.049MB

 

연관자원

하위 문화자원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