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일: 1913.08.10
사망일: 1982.11.20
행위분야: 예술인
인물경력
- 1932년 한성중학교를 졸업한 후, 1934년 일본 도쿄(東京) 센슈(專修)대학 전문부를 수료. 이후 국내에 들어와 경성영화촬영소 촬영기사로 입사하고 영화 한 편을 촬영.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신코(新興)키네마에 들어가 수업한 뒤 정식 촬영조수로 일함. 이때 일본에서 가나이 세이치(金井成一)란 일본식 성명으로 활동.
- 1937년 7월 도쿄에서 활약하던 조선인 예술가를 총망라해 조직한 동경조선영화협회(東京朝鮮映畵協會)에 가입
- 1939년 일본촬영기술협회 시험에 합격해 정회원이 됨.
- 1939년 잠시 귀국해서 신예 감독이던 방한준(方漢駿)의 「성황당(城隍堂)」을 촬영. 정비석(鄭飛石)의 원작을 영화화한 「성황당」은 조선의 토속적인 정서를 담고 있는 영화임. 당시 국내 영화계에서는 촬영기사 이필우(李弼雨)•이명우(李明雨)•이창용(李創用) 등이 활발하게 활동. 김학성은 이들의 뒤를 이은, 일본에서 정식으로 촬영을 공부하고 돌아온 젊은 세대의 대표 주자.
- 1940년 고려영화협회 촬영부에 입사.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활동하던 중 방한준의 방문을 받고 조선으로 돌아옴.
친일행적
- 1941년 최인규(崔寅奎)가 연출한 「집 없는 천사」(家なき天使)를 촬영. 이 영화는 거리의 부랑아를 고아원에서 교육한다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조선의 어린이가 충실한 황국신민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림.
- 1942년, 가난한 마을 사람들이 성의를 다해 영군대(令軍隊)를 맞이해 함께 총동원 체제의 생산력 증강을 도모한다는 내용의 「풍년가(豊年歌)」(방한준 감독), 교통질서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내용을 선전하기 위해 경기도 경찰부 보안과에서 기획한 「명랑한 도로」(明るい鋪道) 등의 영화를 촬영. 1942년 9월 조선의 영화를 통제하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설립한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촬영과 사원으로 입사.
- 1943년 안석영(安夕影)이 연출한 「조선에 온 포로」(朝鮮に來た浮虜)를 최순흥(崔順興)과 공동으로 촬영. 조선군사령부가 후원한 이 영화는 조선에 수용된 영국군 포로의 일상생활을 기록한 영화로, 정당한 포로대우를 묘사함으로써 천황의 큰 은혜를 알게 하려는 의도로 제작.
- 같은 해 이병일(李炳逸)이 연출한 「반도의 소녀들」(半島の乙女達)을 촬영. 이 영화는 음악문화영화로서, “반도 일류의 가수 이난영, 이화자와 김소영, 홍청자, 김영 등이 경연한 외에 재성 각 고등여학교 학도 오천여 명이 출연, 총후 반도여성의 명랑한 풍경을 그려 음악영화의 이색편을 이루었다.”는 평을 받음.
- 1944년 방한준이 연출한 「거경전(巨鯨傳)」을 황운조(黃雲祚)와 공동으로 촬영. 이 영화는 조선의 청년이 일본의 청년처럼 무사도 정신을 길러 해양 일본의 전력 증강을 꾀한다는 내용. 멜로적 정서가 강하게 묻어 있는 영화이지만 주요논리는 미국에 비해 부족한 자본력을 정신력으로 극복하자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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