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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홍(呂運弘)

출생일: 1891.09.01 사망일: 1973.02.03 행위분야: 기타 인물경력 - 몽양 여운형(呂運亨)의 동생. 1909년 경성 중앙중학교를, 1910년 경신학교 졸업. - 1913년 9월 미국에 유학하여 1918년 오하이오주 우스터(Wooster)대학 철학과를 졸업. 이후 프린스턴대학 연구실에서 연구. -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여운형•서병호(徐丙浩)•선우혁(鮮于爀) 등과 프랑스조계(租界)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상해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했으며, 이후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 이해 8월 파리평화회의(平和會義)에 김규식(金奎植)•조소앙(趙素昻) 등과 한국대표로 참석했다가 김규식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감. - 1920년 상하이로 건너가 1921년까지 인성(仁成)학교 교장을 맡음. 1920년 9월 상하이 조선인거류민단 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21년 6월에는 국민대표회기성회(國民代表會期成會) 제1회 총회에서 위원으로 선출. 이해 9월 귀국했다가 체포되었으나 무혐의로 석방. - 1921년 11월 워싱턴에서 열리는 태평양회의에 대비하여 상하이에서 조직된 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 재무 간사. 1922년부터 1925년까지 보성전문학교 영문학 교수로 재직. - 1922년 1월 조선과 만주의 부원(富源) 개척과 재외동포의 생활 향상을 목적으로 선만협회(鮮滿協會)가 설립되자 부회장에 선임. 3월 외국 문화의 수입과 조선 사정을 외국에 알리기 위한 세계협회(世界協會)의 발기인으로 참여. 4월 베이징(北京)에서 개최된 만국기독교학생청년회(萬國基督敎學生靑年會) 총회에 조선기독교청년회 대표로 이상재(李商在)•이대위(李大偉) 등과 참가. - 1925년 상하이에서 형 여운형과 함께 여려공사(呂麗公司)의 주무(主務)를 담당. 이해 8월에 귀국. - 1927년 1월 오의균(吳毅均) 등과 함께 농촌계발과 문맹퇴치를 목적으로 한 조선농인사(朝鮮農人社) 조직에 참여했고, 조선농인(朝鮮農人) 8월호(1927년 8월)의 발행을 담당. 1927년부터 1939년까지 싱거미싱회사 조선감독원으로 재직. 같은 기간동 안 조선관염판매(朝鮮官鹽販賣)주식회사 이사로도 활동. - 1935년 6월 조선체육회 이사를 맡았고, 1940년 서양 요리점인 백합원을 경영. 친일행적 - 1941년 9월 전시체제하에서 조선인들의 전쟁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조직한 전시체제기 최대의 민간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경성)으로 참여. 같은 해 12월 조선임전보국단 주최로 부민관에서 개최된 미영타도 대연설회에 이광수(李光洙)•김동환(金東煥) 등과 함께 참석해 ‘유색인종 해방의 성전(聖戰)’이라는 제목으로 강연. 이 내용은 1942년 삼천리 1월호에 「동아공영권 건설의 성전」이라는 제목으로 게재. 동양의 침략자 영•미 타도의 대사자후! 라고 소개된 이 글에서 “이번 제국이 영미에 대한 선전포고는 대동아공영권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영미의 침략과 착취 밑에서 신음하던 동양인의 동양을 건설하는 성전이다. 유사 이래 처음으로 있는 성전”이라고 주장하면서 전쟁에서 승리할 때까지 힘써 싸울 것을 강조. - 1942년 조광 2월호에 기고한 「대동아전과 우리의 결의 ― 신성한 의무」에서도 “이 대동아전쟁은 숭고하고 위대한 목적을 위한 거룩한 성전(聖戰)”이라고 하면서 “우리들은 우리들의 있는 바 가진 바 모든 것을 다 국가에 바쳐서 이 거룩한 목적을 완수하여야만 할 것이다. 우리들의 몸까지도 국가의 것으로 알아서 언제든지 국가가 부르면 예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나서야 될 것이다.”라고 하여 전쟁협력을 강요. 12월 매일신보사에서 주최한 ‘대동아전쟁의 전망’ 좌담회에 참석. - 1943년 11월 임시지원병제도익찬위원회가 종로지역의 지원병제도 홍보와 권유를 위해 주최한 가정방문 계몽행사에 실행위원을 맡아 고원훈(高元勳)•이광수•조병상(曺秉相)•한상룡(韓相龍) 등과 제2반 위원으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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