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내용
(전면) 大功德主 輔國尹公德榮 判書洪公淳馨 參判李公達鎔 主事李侯宅鍾
永世紀頌碑
(후면) 玅寂之佛宇將頹尹洪李三公均施二百/ 金以之重造殿堂, 竗寂之佛糧 告罄李侯/ 納稻田楊州月文里在二千四百五十坪/ 以之亨通千秋. 住 持金鍾浩君務圖頌功/ 而上石盖乎 量四方空之福德, 孰多孰少./ 佛紀 二千九百五十八年辛未七月 日/ 龜山沙門映湖鼎鎬謹書
풀이
(전면) 대공덕주 보국(輔國) 윤공 덕영, 판서 홍공 순형, 참판 이공 달용, 주사 이후 택종 영세기송비
(후면) 묘적사(玅寂寺)의 불우(佛宇)가 무너지려고 하자 윤·홍·이 3공(公) 이 이백 금을 균등히 보시하여 불당을 중건하고, 묘적사의 불량(佛 糧, 불공에 쓰는 곡식)이 다 떨어지자 이(李) 후가 양주 월문리에 있는 2,450평 논밭을 바쳐 천추토록 형통하게 하였다. 주지 김종호 군이 공 (功)을 기림을 도모하고 실행하여 비석을 올려 덮으니, 한 사방에 없는 무량복덕(無量福德)이 누가 많고 누가 적겠는가?
불기 이천구백오십팔년(1931) 신미 칠월 일 구산사문 영호정호(映湖鼎鎬) 삼가 씀
설명
이 비석은 묘적사의 불당을 중건할 때 윤덕영(1873~1940), 홍순형(1858~1934), 이달용( 1883~1948) 3인이 큰돈을 시주하였고, 불공에 쓰일 곡식이 부족할 때에 이택종(1888~?)이 논 2,450평을 헌납한 사실을 기려 이 절의 주지 김종호가 1931년 7월에 세운 송덕비이다. 비문은 영 호정호(映湖鼎鎬, 석전 박한영) 선사가 짓고 썼다.
여기에 공덕주로 나오는 윤덕영은 ‘경술국적(庚戌國賊)’의 1인으로 꼽히며, 병합조약 체결에 협 력한 공으로 일제로부터 자작(子爵)의 작위를 받았다. 이후 중추원 부의장(1940.8)과 일본제국의 회 귀족원 칙선의원(1939.12)을 지내는 등 대표적인 친일부역자의 한 사람이다. 이달용은 왕족 일 가인 이재완 후작(李載完 侯爵)의 습작자이고, 홍순형은 예조판서를 지냈으며 경술국치 당시 일 제가 주는 남작 작위를 거절한 인물이다. 이택종은 화도면장(1914.4)을 거쳐 1935년 9월 이후 양 주군 와부면장을 역임했다.
- 파일명 38-011.jpg
- 파일 형식 jpg
- 파일 크기 5.204MB
- 파일명 38-012.jpg
- 파일 형식 jpg
- 파일 크기 4.563MB
- 파일명 38-001.jpg
- 파일 형식 jpg
- 파일 크기 0.384MB
- 파일명 38-002.jpg
- 파일 형식 jpg
- 파일 크기 0.315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