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일: 1902.08.27
사망일: 1954.06.22
행위분야: 기타
인물경력
- 1917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1919년 3•1운동과 관련해 제적당하고 보성고등보통학교로 전학해 1921년에 졸업.
- 1922년 일본 릿쿄(立敎)대학 영문과에 입학해 1927년에 졸업.
- 1927년 릿쿄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후 귀국해 보성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연희전문학교 강사로 출강. 이듬해인 1928년 1월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해 영문학 등을 강의.
- 1930년부터 본격적으로 시를 써 동아일보 등에 실었고, 이외에도 영문학자로서 외국문학을 번역해 소개.
- 1933년부터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서 문과과장을, 1939년 7월부터 학감 겸임.
- 1939년 시집 망향(望鄕)을 출간했으며, 이 시집에 「남으로 창을 내겠소」가 실림.
- 1943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영어과가 폐지되면서 교수직에서 물러났고, 이후 장안화원(長安花園)을 경영.
친일행적
- 1938년 6월 이화애국자녀단(梨花愛國子女團)이 발족하자 간사로 활동. 이화애국자녀단은 “총후보국(銃後報國)의 내조적 역할을 공고히 한다”는 목적으로 조직되었으며, 그 단장은 김활란(金活蘭).
- 1939년 10월 ‘국민문학’의 건설과 ‘내선일체’의 구현을 위해 조직된 조선문인협회의 발기인으로 참여.
- 1941년 9월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하기 위해 조직된 전시체제기 최대 민간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으로 참여.
- 1942년 5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연예단체를 일원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조선연예협회를 조직하고 연예각본을 모집할 때 심사위원으로 참여.
- 1942년 2월호 반도의 빛(半島の光)에 일제가 ‘근로보국(勤勞報國)’의 취지로 추진하던 국민개로운동(國民皆勞運動)에 적극 호응해 학생들의 ‘근로봉사’를 독려하고 그 교육적 중요성을 역설하는 글 「땀의 기쁨」을 발표.
- 1942년 2월 15일부터 매일신보가 ‘신가파(新加坡)의 함락과 문화인의 감격’이라는 주제로 일제의 싱가포르 함락을 축하하는 명사들의 글을 연재할 때, 같은 해 2월 19일자에 「성업(聖業)의 기초완성」이라는 글을 통해 “해방의 성업이 오늘로 일반(一半)을 이룬 것이다. 여기 사항락(獅港落 : 싱가포르항 함락) 쾌보를 듣는 나의, 우리의 넘치는 희열이 있다.” 라며 일제의 승전을 축하.
- 1943년 8월 1일부터 8일까지 매일신보가 ‘조선징병제 실시 감사 결의 선양주간’에 맞춰 1면 특집으로 유명 문인과 화가의 시화인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를 연재할 때, 8월 4일자에 다음과 같은 시를 기고해 징병제를 찬양. “물결 깨어지는 절벽 이마 위 / 가슴 헤치고 서서, 해천(海天) 향해 휘파람 부는 듯, / 오랜 구원 이룬 이날의 기쁨이여! / 말 위에 칼을 들고 방가(邦家)의 간성(干城)됨이 / 장부의 자랑이거늘, 이제 불리니 / 젊은이들아 너와 나의 더 큰 광영이 무어랴. / 나아가는 너희들 대오에 지축이 울리고, / 복락의 피안으로 깃발은 날린다. / …… / 충(忠)에 죽고 의(義)에 살은 열사의 희원, / 피로 네 이름 저 창공에 새겨 / 그 꽃다움 천천만대에 전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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