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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삶 - 두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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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군 지평면 이동선

막걸리 한잔과 모내기 풍경

“더운 여름 날 목마를 때 막걸리 한 잔 먹어봐 꿀떡꿀떡 넘어가지,
그래서 옛날 우리 시어머니들은 막걸리에 그렇게 찬밥을 말아 드셨어… 얼마나 시원한데…
농사일로 지쳐서 밥알이 쉬 안 넘어 갈 때 막걸리에 말아 먹으면 달달한 맛에 넘어가고,
술기운에 넘어가고… 그때 어머니들은 다들 그렇게 먹고 사셨어.”

막걸리 인심이 모락모락

지평의 가장 동쪽인 양동면은 경기도답지 않은 곳이다. 강원도 횡성과 경계를 이루는 산줄기가 남북으로 이어져,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지만 강원도 산간지방과 다름없는 외진 산골의 풍경을 지녔다. 양동면에서 나고 자란 이동선 씨는 스무 살이 되던 해 겨울, 고향을 떠나 지평으로 왔다. “양동면 매월리에서 살다가 40년 전, 사랑하는 서방님을 따라서 지평으로 시집을 왔어요. 그때부터 지평에서 아들 딸, 둘을 낳고 살고 있죠. 지금은 손자까지 삼대가 지평에 살고 있어요.” 아버지 외사촌 누님의 중매로 지금의 남편을 만나, 떠나온 지평면은 그녀가 살던 양동면과 같은 듯 달랐다. “시골은 거의 같은데… 차이라면 양돈에서는 펌프로 물을 뽑아 먹었는데, 지평에 오니까 그냥 퍼다 먹을 수 있었어요. 그리고 그때 기억에도 지평면 물이 고향보다 좋았던 것 같아요.” 물과 더불어 또 다른 차이는 바로, 막걸리였다. “지금은 양동면에도 막걸리가 있는데, 그때는 없었어요. 지평에 와서 처음으로 막걸리를 맛봤어요. 달달하니 맛있더라고요. 그때부터 주전자에 막걸리를 받아다가 먹기 시작했죠. 지금도 우리 서방님하고 한 잔씩 해요.” 이동선 씨가 마실 수 있는 술은 막걸리뿐이다. 40년간 마셔온 막걸리의 주량 또한 ‘두 잔’으로 소박하다. 하지만 그 두 잔에도 나름의 주도를 더해 즐긴다. “술 종류를 잘 못하는데 막걸리는 먹어요. 주량은 딱 두 잔. 그래도 나름 맛있게 즐기는 법이 있죠. 먼저 여름에는 막걸리를 받아다가 시원한 냉장고에 살얼음이 낄 때까지 넣어둬요. 적당히 얼음이 얼면 살짝 살얼음을 제치면서 떠먹는데…그 술맛이 진짜 맛있어요. 반대로 추운 겨울에는 따뜻하게 데워야지, 새끼손가락을 넣어봐서 따뜻하다 싶을 정도로만 살짝 데워서 먹으면 또 맛있고…” 막걸리 맛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청하자, “지평막걸리는 톡 쏘면서도 달달하고, 잘 취하지 않아요. 머리도 덜 아프고… 숙취가 없지. 그래서 술을 잘하진 못하지만 막걸리는 좋아해요. 그리고 난 밀보다 쌀막걸리가 더 맛있어요. 내 입에 밀막걸리는 조금 저거해요. 쌀은 넘어갈 때 부드럽게 넘어가는데 밀가루는 미끌미끌하다 그래야 하나… 맛의 차이는 없는 것 같아요.” 최근, 사람들이 지평막걸리를 많이 찾는 이유도 아마 변함없는 술 맛 때문일 거라 말한다. 그리고 그 술 맛은 양평의 좋은 물 때문이라고도 전한다. “지평 땅이 물이 좋아요. 저 위쪽에 샘이 있는데, 나도 그 물로 장 담그고, 김치도 담고 손님상에 식수로 내고… 그래서 김장철이 되면 사람들이 물 받으러 지평에 많이 와요. 와서는 물도 받아가고, 술도 받아가고… 무튼 물맛이 중요해요. 술은” 그녀는 13년 전부터 고아한 한옥에서 보리밥과 막걸리를 팔고 있다. 이집 메뉴판에 오른 술 메뉴는 딱 하나, 동동주다. 사실 이름은 동동주지만 지평양조장에서 빚어지는 막걸리 특주다. 손님들 중 굳이 ‘다른 술을 먹겠다’ 하는 이가 있으면 마트에서 사다줄 뿐, 메뉴에 다른 술을 올리진 않는다. “여기 음식은 모두 우리가족이 다 농사지은 재료로 만들어 파는 거예요. 이 땅에서 농사 지어 파는 음식이니, 이 마을에서 빚은 술과 가장 잘 어울리겠지. 그래서 지평막걸리만 팔아요.” 막걸리를 팔면서 외지인들과 지평사람들의 막걸리 즐기는 방법이 조금은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됐다. “외지 분들은 그냥 조그만 잔에다 드시는데, 우리 지평 분들은 옛날식으로 스뎅(스테인리스) 대접에다 드시는 분들이 있어요. 꼭 스뎅 대접 잔을 달라고 하시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시어머니와 막걸리

맛은 때론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가게 한다. 막걸리를 잔이 비워지자 옛 시어머니 기억이 떠오른다. “더운 여름 날 목마를 때 막걸리한 잔 먹어봐 꿀떡꿀떡 넘어가지… 그래서 옛날 우리 시어머니들은 막걸리에 그렇게 찬밥을 말아 드셨어요. 얼마나 시원한데. 농사일로 지쳐서 밥 먹기 힘들 때, 밥알이 쉬 안 넘어 갈 때 막걸리에 말아 먹으면 달달한 맛에 넘어가고, 술기운에 밥알을 넘기고… 그때 어머니들은 다들 그렇게 먹고 사셨죠. 그 시절 그녀도 시어머니 곁에서 막걸리 밥을 맛봤다. “우리 시어머니는 밥맛이 없고, 입맛이 없을 땐 꼭 막걸리에다 밥 말아 드시더라고. 우리 시어머니께서 그거 진짜 많이 잡수셨어요. 어머니 드실 때 나도 좀 얻어먹어 봤지. 맛이 어떠냐고? 그게 숭늉보다는 좀 진하지. 숭늉은 좀 걸쭉한데 이거는 밥알이 호로록 넘어가니 맛있어요. 뭘 물어요. 궁금하면 먹어보면 되지.” 당시 우리네 어머니, 할머니들이 막걸리에 말아먹은 밥은 그냥 밥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루 종일 뙤약볕 밑에서 일하고 집에 돌아와 흙 묻은 손으로 막걸리에 말아 먹던 찬밥 한 사발은 그 어느 진수성찬보다 맛있었을 것이고, 그 밥과 술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목숨줄 과도 같았을 것이다. 그녀의 기억 속 어머님에 대한 또 다른 기억은 술을 담그던 모습니다. 특히 시어머님은 동네에 유명한 양조장이 있음에도 직접 술을 빚으셨다. “친정어머니도, 시어머니도 집에서 직접 술을 담그셨었어요. 옛날에는 제사 때고 뭐고 다 담가서 먹었으니까… 지금은 냉장고가 있어 계절에 상관이 없지만, 옛날 냉장고가 없을 때는 주로 겨울에 막걸리를 담았어요. 보통 담근 지 일주일이 지나면 먹을 수 있었고요.” 어머님이 담근 막걸리와 사먹는 막걸리 중 무엇이 더 맛있느냐 물었다. “당연히 어머니가 담근 게 맛있죠. 어머니가 담근 건 어머니 정성이 들어가 있으니까 그게 더 맛있지. 음식은 뭐든 재료도 중요하지만 정성으로 지어, 사랑하는 사람하고 같이 먹을 때, 그때가 제일 맛있는 거예요.”

농사일에 쓰이는 술, 농주

막걸리는 예나 지금이나 농사철에 빼 놓을 수 없는 음식이다. 오죽했으면 농가에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술이라고 하여 ‘농주’라고도 불렀을까. “옛날 우리 시아버지한테 들은 얘긴데, 옛날엔 다 손으로 모를 심었잖아요. 그 사람들 마시라고 우리 논 모내기 할 때면 항아리 동이에다 막걸리를 받아다 논두렁에 뒀어요. 그럼 사람들이 버들피리 대를 빨대 삼아 동이에 얼굴을 묻고 쪽쪽 마시고… 그러다 취해 자빠지고… 지평 마을의 농사 풍경이었지…” 비단 농사철만이 아니다. 삼대가 한동네에 살기에, 가족들이 모일 때면 막걸리가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지 않는다. “아들이랑은 술잔을 앞에 놓고 ‘우리 아들 올해 농사짓느라 고생했다’, ‘무엇보다 건강해라 살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눠요. 여름에는 감자전에, 겨울에는 김치전 또는 배추전을 부쳐 놓고… 우리 남편도 제가 술 먹는걸 안 싫어해요. 적당히 먹고 즐겁게 마시니까.” 소박한 손맛 자랑하는 그녀가 지평막걸리를 마신 후 추천하는 해장국 역시 시래기해장국이다. “농사지은 시래기에 된장을 넣어 푹 끓여 먹으면 속도 편하고 구수하고 진짜 맛있어요. 그리고 시래기 널어 말리는 풍경도 정말 예뻐요. 맛도 좋고, 예쁘기도 하고, 일석이조에요” 직접 농사지어 밥상에 올리기까지의 수고를 마다않는 이 집의 밥맛이 궁금해 보리밥을 주문했다. 특별한 식재료를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요란한 모양새와 대단한 맛을 자랑하지도 않는다. 예전 집에서 먹던 밥을 내놓듯 하나하나 차려놓은 찬들은 지킬 건 지키고 보탤 건 보탠 정성스런 음식 맛이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과 뜨끈한 된장국, 달달한 막걸리 한 사발, 그리고 훈훈한 주인장의 마음씨까지 더해진 밥상… 이곳에선 혼자 밥을 먹어도 외롭지 않고, 술을 혼자 마셔도 춥지 않을 것 같다. 밥을 파는 한옥집 또한 고아한 자태가 멋스럽다. “이집을 산진 15년 정도 됐어요. 지은 지는 더 오래된 집이에요. 동네에 73살 되신 어르신이 계신데 초등학교 다닐 때, 이집 상량 떡을 얻어 잡수셨데요. 정확하진 않지만 한 70년은 넘은 걸로 알고 있어요. 그리고 이 집을 지을 때 쇠못을 하나도 안 썼다고 해요. 쇠못을 쓰는 대신에 싸릿가지 못으로 해서 지었다고.”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우리 삶에 술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물었다. “술을 먹으면… 기분이 좋을 때는 더 좋아지고, 안 좋을 때는 술 한 잔 먹으면 잊어야 될 것들이 묻히고 그러니까는… 그래서 전 술이 좋아요. 살면서 비울 수 있는 건 빨리 비워야 되요. 마음속에다 넣고 있으면 힘들어… 술이 그럴 때 많이 도움이 되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