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학

김인학(70, 이발사)님은 35년 동안 남양주시 중촌마을 협동이발관을 운영하며 사람들의 머리를 책임지고 있다. 중촌마을은 투기가 과열되어 아파트촌이 되어버린 남양주시에서 몇 안 남은 달동네이다.

Q. 중촌마을에 정착하게 된 계기는?

옛날에 여기에 밍크 공장이 있었는데 동생이 그 공장에 다녔어요.
나는 서울로 출퇴근 하지만 동생이 여기 자취를 하니까 같이 있자고 해서, 여기 자리 잡게 됐지요.

Q. 35년 동안 이발관을 지켜온 비결?

여기가 마을 이발관이라 다른 업소보다도 좀 쌌었지요.
예를 들어서 요새 돈으로 그때 5천원 받으면 여기는 2천원, 2천500원.
반값 밖에 안 받았었어요.
-그래서 이곳에 그 이후로 지금까지 계속 계신 거지요?
그렇지요.
마을 주민들이 한 곳에 오래 하고 하니까 “저놈은 됐구나.” 이렇게 생각했는가 봐요.
이발소 오래 줘도 되겠구나, 마을에서.
- 신뢰감이 생긴 거군요.
그래서 오래 한 거지요.
안 그러면 여기도 오래 못 있지요.
내가 한마디로 머리를 잘 깎는다는 게 아니라, 포용하고 이러니까 오래 한 거지요.

중촌 마을회관이던 협동이발관은 여전히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아파트촌이 들어서고 오고 가는 정이 사라지고 있는 가운데에도 여전히 이웃사랑을 간직하고 있다.

Q. 예전 중촌마을의 경제생활은?

경제생활은 농사지었지요.
조금 나가면 논이었어요. 논이었던 게 지금은 없고.
그때 중촌마을이라 요리큼한 집이 있었대요.
지금 요리 개발 안 된 데 있었대요, 옛날에.
그래서 중촌마을.

Q. 이발소를 처음 차렸을 때의 배경?

원진레이온 공장에서 하도 냄새가 나고 사람들이 막 쓰러지고 이러니까 중촌마을 사람들이 “못 살겠다.” “떠나라.” 하고 데모를 했는가 봐요, 청년회 4H 하면서.
그러니까 입막음하려고 이 땅을 희사를 했대요.
그래서 청년회에서 짐 지고 집을 지었대요.
그래서 이 건물이 생긴 거라.

Q. 90년대 이후 인근 지역이 변화?

자꾸 아파트가 들어선 거지요.
사람만 많아졌지.
저는 발전이라는 생각이 안 들어요.
왜냐 하면 발전이 되면 큰 학교가 들어오든가, 큰 병원이 들어오든가, 이런 게 들어와야 뭐가 상권이 되고 하는데.
시장하나 없었으니까.

Q. 아파트촌이 형성되고 난 후?

어떤 사람은 “야, 그것 좀 올랐으니까 팔아라. 팔아서 다른 데 또 사가지고 팔아 가라,” 그런 소리도 들어왔어요.
애들 있지, 나이 많으신 또 아버님도 있지.
이러니까 그런 걸 못 했지요.
솔직하게 ‘아이고 이것만 해도 우린 가진 게, 행복하게 살면 된다.’ 이런 마음이 있었지.
- 맨 처음에는 논밭이었다고 그랬잖아요. 그분들은 다 어디 계속 계신 건가요, 이 지역에? 아니면 나가신 건가요? 나가신 분들들 있고, 한마디로 말하면 졸부가 된 거지.
- 대체로 그분들이 여기 그냥 계속 사시나요?
그런 분들은 별로 없어요.
나가서 사시는 분들이 좀 많더라고요.
옛날 말로 말하자면 여기만 달동네가 된 거지요.
여기 중촌마을만 쏙 들어간 거지요.
그전에 여기 살 적에는 그래도 “아이고, 우리 집에 와.”이러고 서로가 교류가 있었는데,
아파트가 생기니까 그런 게 없지요.
없다고 봐야지요.

Q. 중촌마을 주민으로서 바라는 점이 있다면?

저도 아파트촌 생기면 여기를 떠나야지요.
그러니까 나이 70인데 얼마나 하겠어요?
여기도 언젠가는 되겠지요.
여기만 남을 수가 없잖아요.
아파트촌보다는 정이 있고 하니까 이대로 살았으면 좋겠다는 거지요.
나이 많으나 적으나 어디 갔다 오다가도 여기 들르고.
저는 ‘제2의 고향’이라고 생각해요.
여기 남양주 여기가 도농동이 고향이나 마찬가지예요.
여기서 40년 살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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